문서사료 21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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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를 농락한 3인방요약설명 : ‘고대 잔 다르크 사건’으로도 불린다. 2차 광화문 시위는 6개 대학연합 등 여러 갈래에서 준비했으나 10월 10일부터 12일 사이에 주모자 대부분이 검거되어 무산된다.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당하던 도망자 성 욱, 이우재와 여기에 새로 합류한 양민호도 이때 붙잡힌다. 하지만 이들은 소임을 다한 뒤였다. 긴급조치는 학생들에게 더 이상 넘지 못할 철벽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긴급조치 9호와 유신체제는 잔여 수명이 1년을 앞두고 이미 균열이 나고 있었다. 글 신동호(경향신문 논설위원) <주간경향>에 '신동호가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시민운동 관련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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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을 아시나요? - 4.19 혁명요약설명 : 오후 4시 유진오 고대 총장이 나왔다. 그리고 총장과 내무장관 사이에 담판이 벌어져 연행학생을 전원 석방하기로 약속하였다. 연행된 동료학생들이 나오자 학생들은 해산하기로 하고 오후 6시경, 백차와 보도 차량의 선도를 받으며 질서 정연하게 학교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뜻하지 않는 곳에서 반전을 기다리고 있는 법이다.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을 앞을 지나려는 순간, 선도하던 백차가 옆으로 빠지면서 갑자기 난데없이 도로 옆 골목에서 쇠망치, 몽둥이, 벽돌, 쇠사슬 등을 든 한 무리의 건장한 괴한들이 쏟아져 나와 학생을 향해 닥치는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억, 악,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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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사라진 조직, 천주교정의구현 전국학생총연맹요약설명 : 조성우(고대 행정 4) 1심 징역 자격정지 7년 2심 기각 등 관련자 22명이 상상을 초월한 형량을 선고받았다. 주목받지 못한 사건 이 사건은 1년 전에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에 비견되는 대규모 조직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면서 유신에 반대하는 운동을 신문방송에서 보도하지 못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당시 정권이 불과 1년 전에 민청학련사건으로 학생운동을 일망타진했다고 여겼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학생운동의 뿌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부담을 느껴 적극 통제에 나섰기 때문에 더더욱 알려지기 어려웠다. 이같은 이유로...
구술 컬렉션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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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충수면담자 : 신동호
일자/장소: 2013.9.25./현대사기록연구원
요약설명 : 《고대신문》 기자가 되기까지, 역사상 인물 가상재판에 얽힌 이야기, 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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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환면담자 : 신동호
일자/장소: 2012.10.2./현대사기록연구원
요약설명 : 체육 관련 및 통일 분야 사회활동 계속, 서울대 법대 진학하게 된 사연, 한배모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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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운면담자 : 오세제
일자/장소: 2008. 10. 22.(1차), 10. 26.(2차)/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흥사단
요약설명 : 아사히신문 보도, 중정의 이진봉, 시위 전술의 변화, 외부의 도움과 조사 과정의...
일지사료 18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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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설득으로 시위대는 학교로
일자 : 1960.4.18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고대 만세”를 부르고는 스크럼을 짜고 학교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그러나 43명의 학생들만은 오후 8시 10분 경까지 앉은 자세로 스크럼을 짜고 철야 농성에 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150명 정도의 경찰관들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승용차에 분승하여 귀가조치 하였다. 그들은 해산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15-216쪽 ;『동아일보』1960. 4. 19 석1면. 서울신문은 “경찰관에게 얻어맞았다는 30명의 학생들은 끝내 학교로 돌아가기를 거부코 의사당 앞에서 계속 농성 하려고 하는 것을 7시 반쯤 지나 경찰관들이 강제로 한 사람씩 택시를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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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대학생 시위의 시작을 열다
일자 : 1960.4.18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고대신보』1960. 5. 3 2면 ; 사월혁명청사편찬회, 『민주한국 사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499쪽 ;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반면 일부 기록은 고려대생 시위 인원을 “4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10쪽 ; 조화영 편, 78쪽). 서울신문에는 “하오 1시 직전 고대생 200명도 시내서 첫 데모를 했다”고 보도하였다(『서울신문』1960. 4. 18 석3면). 학생회 간부가 신입생들을 위해 준비한 ‘고대’라는 글씨가 프린트되어 있는 수건을 나누어주자 학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마다 수건을 머리에 감고 함성을 올리며 시위로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오후 1시 10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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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증가하는 학생 시위대
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고려대생들은 계속 진출, 오후 1시 30분 경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러 결의안을 낭독하였다.『고대신보』, 1960. 5. 3 2면 ; 『조선일보』1960.4. 19 석3면. 이날 고려대생들은 의사당 앞에서 결의안을 낭독한 후 흥분한 군중 속에 합류하지 않고 조선호텔·동화백화점·퇴계로를 거쳐 종로 5가로 빠져나와 “계엄령을 철회하라”등 구호를 외치면서 학교로 돌아왔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36-237쪽).고려대학교 결의안우리가 이미 주장해 오던 모든 요구를 관철하고 다시금 이 참상을 야기시킨 책임자들을 문책할 것은 물론, 당국은 금반 3·15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데몬스트레이션을 계속할 것을 엄숙히 결의한다.출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