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58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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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도시빈민지역운동 연대회의』보고서
등록번호 : 00043694
날짜 : 1992.03.25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도시연구소
요약설명 : 도시빈민지역운동 대토론회를 통해 빈민지역운동체계가 시급하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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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과 대안 2호 편집 확정안[수신:각 지역 동모임,단체,발신:서울빈민지역운동연대회의]
등록번호 : 00043741
날짜 : 1992.08.19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도시연구소
요약설명 : 빈민운동단체들이 모여 구성한 서울빈민지역운동연대회의가 펴낸 모색과 대안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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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과 대안 2호 편집 기획안[수신:각 지역동모임,참관단체,발신:서울빈민지역운동연대회의]
등록번호 : 00044630
날짜 : 1992.04.27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도시연구소
요약설명 : '재개발운동에서의 대응 방안', '지역활동가 설문조사 결과 분석' 등이 수록될 모색과...
사진사료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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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마당 1990년 11월호 관련 사진 및 필름]
등록번호 : 00549806
날짜 : 1986.00.00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한국YMCA전국연맹
요약설명 : 건설운동과 청년YMCA(1989.3) 1988~1989년 광주 청년YMCA 활동사진 1989년 전주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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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빈민 운동가 및 도시빈민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도시재개발에 관한 공청회
등록번호 : 00700414
날짜 : 1985.04.27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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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개발 간담회에서 연설하는 문익환 목사와 빈민운동가들의 모습
등록번호 : 00743675
날짜 : 1985.04.27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영상사료 4건
더 보기민주화운동사 컬렉션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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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철거민 투쟁
요약설명 : 볼 수 있다. <[목동 지역 주민운동 조사서]>(등록번호 : 48127)는 손으로 기록한 일종의 실태조사로, 철거민의 삶을 계속해 온 목동 주민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다시 어디로 가야 하나?-목동.신정동 주민 이젠 오갈 데도 없다>(등록번호 : 72458)는 안양천 변 움막집부터 시작해 어렵게 삶을 일궈오다 또다시 철거를 당하게 되자 이렇게 절규한다. “재산세, 취득세, 하천부지사용료를 받아먹은 당국이 이제 무허가 건물이라고 나가라고 한다면 도대체 서울시가 시민을 위하여 있는 겁니까, 괴롭히려고 있는 겁니까? … 20년 전 우리들을 청소차로 허허벌판에 내던져 버리고 나서 벽돌 한 장 시멘트 한 부대 주어 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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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빈민연합 결성
요약설명 : ‘전국빈민연합’ 조건으로 총 98건, ‘전빈련’ 조건으로 총 11 건, ‘전빈연’ 조건으로 총 11 건이 검색되었다. 전빈련 출범 이전의 주요사료로는 <전빈련 건설과 관련된 정책토론 결과보고서>(등록번호 : 44547), 전빈련 신문 <창간준비호>(등록번호 : 169214), <전빈연 결성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등록번호 : 108305)등이 있으며, 창립 직후의 <전빈연 신문 호외>(등록번호 : 120895), <제1차 중앙위원회 회의>(등록번호 : 125077), 정간물 <빈민운동 제3호>(등록번호 : 125028), 평가자료집 <전국빈민연합-90년 상반기 투쟁, 국민연합 평가와 반성>(등록번호 : 125076), <89...
사료 콘텐츠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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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농민, 빈민, 인권 운동 구술 영상 서비스
요약설명 : 형태로 수집하여 보존관리하고 있었다. 이 자료의 디지털 변환을 완료하여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다수의 구술 영상을 포함하여 서비스 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운동은 구로동맹파업, 노동운동사건, 노동운동 생애사 등 17건의 구술 영상을 서비스한다. 기존 ‘1970년대 노동운동’에서 노학연대와 노동운동 생애사 서비스를 ‘노동운동’으로 통합하였다. 농민운동은 60~70년대 농민운동, 사제들의 활동, 오원춘사건, 함평고구마사건, 춘천가톨릭농민회사건 등 41건의 구술 영상을 서비스한다. 빈민운동은 1970년대 빈민운동, 광주대단지시위사건,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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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자식들의 아버지 - 허병섭 목사
요약설명 : 없다”고 선언한 그는 다시 평신도가 되어 빈민운동에 헌신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빈민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열정을 쏟았던 허병섭은 1996년 전북 무주로 내려가 생태공동체운동에 매진하다가 2012년 3월 27일 패혈증으로 쓰러져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인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갔다. 글 박민나(자유기고가)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여성노동운동가 8명의 이야기' 출간(2004년 )과 한국여성노동자회 계간지 '일하는여성'에 '박민나의 삶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글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여성의 삶과 문화' 공저,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이총각 편' 연재, 뮤지컬 메노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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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과 빈민선교로 민주화운동 이끌어간 박형규 목사
요약설명 : 1969년 3선개헌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장준하, 함석헌 등 재야인사와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들과 연대해 나갔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어 목회자로서 신망을 받는 한편, 민주화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73년 4월 22일 남산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예배가 열린 날, 박 목사는 민주주의 부활과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당국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극심한 당국의 단속 탓에 박형규 목사는 ‘주여 저 대통령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다 뿌리지도 못했고, 현수막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 시위를 계획했다는 이유를 들어...
구술 컬렉션 4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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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학
면담자 : 김성훈
일자/장소: 2005.11.9./국가인권위원회 사무실
요약설명 : 빈민운동 선택 배경과 수도권, 70년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과 수도권활동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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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용
면담자 : 김성훈
일자/장소: 2005.11.2./구술자 자택
요약설명 : 빈민의 삶과 저항, 지역주민조직 활동, 빈민운동을 하게 된 배경, 운동의 시작과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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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섭
면담자 : 김성훈
일자/장소: 2005.10.18./무주군 진도리 만나공부방
요약설명 : CO조직운동의 시작과 신설동, 유신반대투쟁과 청계천에서의 활동, 내란예비음모사건,...
일지사료 1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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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악법 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 혁신계의 자금제공설에 대해 해명
일자 : 1961.3.20
분류 : 2.8한미경제협정 및 2대악법 반대운동
요약설명 : 자금이 투입되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학생들의 2대악법 반대운동을 고의로 방해하려는 자들의 조작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기세환 공투위 대변인은 “18일 우리들의 2대악법 규탄대회에 비가 쏟아짐에도 지지성원해준 모든 시민 및 양심적인 군경의 모습을 보아도, 민주당이 제정하려는 2대 악법은 전제폭정의 무기이며 민주주의의 파괴자라는 것을 밝혀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학생시위가 끝난 후 일반 시민이 조재천법무장관의 집에 쳐들어가 쌀을 달라며 시위한 사실은 공투위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쌀을 달라고 외친 빈민의 요구는 정권의 악정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석방을 요구한다고 말하였다.『영남일보』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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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문리대에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성토대회
일자 : 1970.11.25
분류 : 분류없음 > 학생
요약설명 : 등 지속적 운동을 펴기로 하고 26일 오전 10시 자진 해산했다.『동아일보』 1970.11.26. 7면; 『경향신문』 1970.11.26. 7면; 『한국일보』 1970.11.26. 7면; 『대학신문』 1970.11.30. 3면결의문우리의 스승 고 전태일 선생의 죽음이 ‘공모타살’임은 명백하다. 우리 대학인도 바로 그러한 공범자 중의 일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유기체적 사회 내에서 부여받은 대학의 사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근로자의 한 사람으로 고 전태일 선생이 전개한 다수의 근로자의 권익을 위한 투쟁을 근로자만이 느낄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고통받는 근로자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애정에서 연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외롭고 의로운 외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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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김낙중 등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발표
일자 : 1973.5.24
분류 : 민주화운동 > 학생
요약설명 : 학생운동을 간첩 사건과 연관시켜 억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973년 5월 24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 김낙중 교수를 간첩활동 혐의로, 고려대생 정발기 등 10명의 학생을 반국가단체조직, 불온유인물 살포 등의 혐의로 구속하는 등 도합 13명을 반국가활동 혐의로 구속, 검찰에 송치했다. 고려대 학생써클인 ‘한맥회’ 회원들은 1971년 당시 사회 전반의 구조적 모순의 결과로 나타난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광주 대단지 사건 등의 노동·빈민문제를 적극적으로 여론화하기 위해 그 실태를 조사, “민족, 민주학원을 수호하자”, “광주는 죽지 않았다” 등의 유인물을 통해 진상을 발표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