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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협 활동을 기억하다
요약설명 : 노동자, 대학생 등을 망라하는 가장 광범위한 구성원을 가지고 있는 가족운동 조직이다. 가족운동의 맹아라 일컬어지는 구속자가족협의회(이하 구가협)가 민가협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구가협은 1974년 민청학련,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인한 구속자 수 증가와 목요기도회 등의 영향으로 설립되었다. 구가협은 이어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로 재편되었는데, 1985년 미문화원 농성 사건, 구로동맹파업, 민청련 사건과 관련하여 비슷한 시기 각기 투쟁하던 가족들이 서로 격려하고 뭉치게 되었고, 가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할 통합조직으로서 민가협이 설립되었다. 1985년 민가협 출범 이후 7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와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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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성사를 풍미한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
요약설명 : 대학생들의 필독서로서 자리 잡았고, 이른바 ‘민경’이라는 약칭으로 불릴 만큼 지성인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로 떠오른 박현채의 저서 《민족경제론》은 일본 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일 만큼 탄탄한 경제 이론서로서 각광받기에 이르렀다. 소년 빨치산에서 경제사상가의 반열에 오르다 박현채는 1934년 11월 3일 전남 화순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 쪽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이모부는 박헌영과 함께 활동했으며 당숙은 사회주의운동에 몰두했다. 이러한 집안의 영향으로 박현채는 어릴 적부터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운동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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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와 민간인 사찰
요약설명 : 사찰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1990년 10월 4일, 보안사 대공처 수사3과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보안사가 민간인을 사찰했다.”고 폭로했다. 윤석양은 보안사 탈영 시에 가지고 나온 동향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3장, 4명(노무현, 문동환, 이강철, 박현채)에 대한 개인신상카드, 개인별 동향파악 내용이 들어있는 컴퓨터 디스켓 30장(447명분)을 공개했다. 민간인 사찰은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자당 김영삼 대표, 김수환 추기경 등 정계ㆍ종교계ㆍ학계ㆍ노동계ㆍ재야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고 있었다. 윤석양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85학번으로, 학생운동으로 4학년 2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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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 학원의 자유 외치며 시위
일자 : 1960.3.8
분류 : 시위 상황 > 대전
요약설명 : 1명의 교사와 40여 명의 학생을 연행했고 40여 명의 학생들을 대전고 교실에 강제 수용했다.동아일보 보도와 달리 조선일보와 한국 일보는 이날 연행된 학생이 61명이라고 밝혔다(『조선일보』1960. 3. 9 조3면 :『한국일보』1960. 3. 9 조3면). 약 50명 이었다는 기록도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80쪽). 일부 기록은 2명의 교사와 100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고 하였다(조화영 편,『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79-291쪽).학생들은 교내 농구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날 학교에 강제 수용된 학생들은『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학원의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뜻에서 시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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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특무대, ‘4·19청년학생동맹원’연행조사
일자 : 1960.4.27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군
요약설명 : ‘4·19청년학생동맹’김일주(28, 건국대 직원) 외 3명을 연행, 이 단체의 성격을 조사하였다. 이 연맹은 지난 26일 이승만이 대통령직 사퇴 성명을 발표하자 “4·19혁명은 성공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여당을 물리칠수 있는 건전한 야당이 없습니다. 야당은 분열과 대립을 본업으로 삼고 있으며, 민중을 속이고 여당의 부패를 더욱 조장할 뿐이요, 정권을 인수할 자격이 없습니다. 악질 친일파 탐관오리 모리배가 완전히 제거되어 민주주의의 토대가 확립된 후에 학생혁명은 끝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린 다음, 자유당 중앙당부를 접수하고 간판까지 걸었다. 이는 이날 종로구 경비를 담당 중인 동국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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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통일 촉진회’조직 발기
일자 : 1960.8.20
분류 : 통일운동과 혁신계활동 > 통일운동
요약설명 : 시기에 이종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간부들이 서울로 올라왔고, 민족건양회의 이종률·박진·문한영 등과 천도교계 인사 박래원 등이 중심이 되어 민자통을 조직하게 되었다(이종률, 『민족혁명론』, 들샘, 1989, 232쪽 ; 『김상찬 수고』, 2쪽(김지형, 「4.19 직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조직화과정」, 『역사와 현실』 21호, 1989, 141쪽에서 재인용)). 인사 이종률이종률은 1925년 5월초 조직된 최초의 사회주의적 학생단체인 공학회(共學會)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후 우리말사건·전국학생동맹휴학 옹호동맹사건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 등을 주도하며 수차례 투옥 당하였다. 이후 1946년 1월 민족건양회를 창립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