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료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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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한일매국조인규탄민중성토대회
등록번호 : 00723079
날짜 : 1965.07.05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한일제협정은 어느것 하나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매국적이라고 단정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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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은 천심이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참가한 보인상업고등학교 학생들
등록번호 : 00723087
날짜 : 1964.03.27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5월 초 한일협정 조인에 합의했다. 3월 24일부터 대일굴욕외교에 반대하며 대학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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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운동장에서 열린 한일매국조인규탄민중성토대회에 모여든 인파
등록번호 : 00723088
날짜 : 1965.07.05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한일제협정은 어느것 하나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매국적이라고 단정한다'고...
민주화운동사 컬렉션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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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이 남긴 것들
요약설명 : 한일협정반대운동은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투쟁과 1965년의 한일협정조인반대투쟁 및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한일협정비준무효화투쟁 등 회담의 전개과정에 따라 투쟁방향을 조금씩 달리하며 진행되었던 운동 전반을 일컫는다. 이는 5.16쿠데타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인 반대운동에 대해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국민들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은 채 1965년 12월 28일을 기해 기어코 한일협정을 발효시킴으로써 을사늑약 60년 만에 다시 한일국교를 열었다. 그때 국민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굴욕적이고 저자세로 일관한 군사정권의 태도에 대한 강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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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로 보는 한일회담반대운동
요약설명 :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그대'는 한일회담을 주도하고 일본에서 귀국한 김종필 공화당의장을 가리킨다. 누구를 위한 회담인가 1964년 3월 28일 성균관대 학생 시위 매국협정 저지시켜 조국수호 이룩하자 1964년 8월 14일, 한일협정비준안이 여당인 공화당의 단독 심의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6월 22일 조인 이후 54일 만이다. 재석 의원 111명 중 110명 찬성, 기권 1명으로 반대는 한 명도 없었다. 이날 학생, 재야, 야당, 시민사회는 일제히 비준 반대 및 무효 투쟁에 들어갔다. 오후 1시, 조국수호국민협의회가 주최한 비상국민대회가 대성빌딩에서 열렸다. 대회에 변영태, 함석헌, 백기완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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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한일회담반대운동
요약설명 : 것은 이완용과 이케다(池田勇人)의 허수아비이다. 이완용은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하면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 깊이 개입했던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을 상징하고, 이케다는 당시 일본 수상이다. 학생들은 한일회담 과정과 내용이 굴욕적 매국적 비민주적이라고 규정하고 강력히 반대했다. 이 시위는 그 후 532일 동안 전개된 대일굴욕외교반대운동, 이른바 6·3운동의 출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은 그로부터 532일 뒤인 1965년 9월 6일 서울대 상대생이 군화와 최루탄, 경찰봉을 불태우는 장면이다.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 시작해 한일협정 조인반대, 비준저지, 비준무효화운동으로 이어지는 6·3운동의 마지막 시위이다. 박...
구술 컬렉션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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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당, “한일회담 지속하면 난동사태 날 것”
일자 : 1961.11.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해외 및 북한
요약설명 :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출판부, 1996,220~224쪽, 274~279쪽. 박진희, 「한·일 양국의 한일협정 반대운동 논리」, 『기억과 전망』 16, 2007. 348~352쪽. 요시자와 후미토시, 「일본에서의 한일조약 반대운동」, 『한일민족문제연구』 vol.3, 2002, 150~158쪽·163~166쪽. 오오타 오사무, 『한일교섭』, 선인, 2008, 399~400쪽한일회담·한일협정에 대한 북한의 반응1951년 한일회담이 시작된 후 매번 회담 때마다 북한은 이를 반대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제1~3차 회담이 있었던 1951~1953년은 전쟁 혹은 전후 시기였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특별히 대응할 겨를이 없었지만, 4차 회담이 진행되었던 195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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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외상회담에 대한 전망, 대일재산청구권과 무상원조 일괄해결 가능성. 어로협정에도 3원칙
일자 : 1962.3.7
분류 : 한일협정추진 > 한·일
요약설명 : 한 소식통은 오는 12일부터 도쿄에서 열릴 한일외상회담에서 한국의 대일재산청구권문제를 ‘청구권’과 이른바 ‘일본의 대한경제협력’을 묶어서 일괄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많으며, 어로협정의 체결은 ① 한국의 배타적인 수역 및 ② 한일공동어로수역의 설정과 ③ 일본의 어업협력의 세 가지 원칙에 입각하여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이러한 원칙에 따라 쌍방이 합의를 본다면 잇달아 열릴 실무자급에서 그 ‘원칙’에 따라 구체적인 숫자를 정리한 후 정상회담에서 정식 조인을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하고, 회담이 순조로이 진행되는 경우 실무자회담에서 조인까지의 기간을 최소한 약 1개월 정도로 본다고 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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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권에 대한 법적 근거 논란
일자 : 1962.3.12
분류 : 한일협정추진 > 한·일
요약설명 : 국제조약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후의 청구권 교섭은 이 제4조의 내용을 전제로 진행되었는데, 한일 양 정부는 1950년대의 교섭에서 제4조의 해석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제4조에 규정된 청구권을 ‘경제협력’ 방식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4조는 청구권을 양국간의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는 것을 제시했을 뿐, 청구권의 내용과 의미와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하지는 않았다. 청구권이 식민지 지배,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청산을 규정한 개념은 아니었다. 이 조약의 정식명칭은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이며, 1951년 9월 8일 조인되고,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다.위의 글은 다음의 문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