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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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쿠데타 외]
등록번호 : 00460457
날짜 : 미상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정기영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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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발자취
등록번호 : 00533158
날짜 : 1991.12.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황원진
요약설명 : 군경의 형성과 재편 2. 한국군의 반민중적 행적 3. 5·16 군사쿠데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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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기와 특종사진: 한국현대사119대사건
등록번호 : 00923275
날짜 : 1993.09.25
구분 : 문서류 > 단행본
기증자 : 김근태재단
요약설명 : 한국전쟁 발발, 5·16 군사 쿠데타, 유신선포, 6·29 민주화 선언 등 119개의 사건을...
사료 콘텐츠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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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님, 총무님, 우리들의 총무님_ 김한림
요약설명 : 아내 공덕귀 여사와 가까운 사이였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 쿠데타로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으려 하자 한림은 윤보선을 설득해 한일회담반대투쟁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당시 한일회담반대투쟁의 주도 인물이었던 장준하와 백기완 정도만 한림에 대해 아는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림을 교사려니 생각했다. 한림은 앞에 나서지 않은 채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구해오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구해오는, 말 그대로 민주화운동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반드시 민주화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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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 여기가 어딘 줄 알아?"_ 무법자의 폭력이 춤추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
요약설명 : 보안사 군사 권력이 거대한 괴물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5·16군사쿠데타로 군인들이 이제 공식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나자 특무대는 다시 방첩부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다시 육군보안사령부를 거쳐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로 거듭 상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군 내부를 감시하고, 나아가 사회 전반을 감시하는 도구로 중앙정보부와 함께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다. 지역 보안부대장인 대령이 별 세 개인 군단장에 맞먹는 세력을 가지도록 한 것이다. 그곳을 보금자리로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그야말로 보안사가 만들어낸 보안사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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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_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요약설명 : 그때 처음으로 구류 20일의 처분을 받았다. 해방 조국에서 맞은 첫 번째 고난이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등장하자 그의 붓끝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조선일보에 통렬한 직설적 기고문을 실었다. “박정희님. 내가 당신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고도, 육군대장이라고도 부르지 않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 여러분은 여러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첫째로 군사 쿠데타를 한 것이 잘못입니다. ...... 또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 박정희님, 당신이 정말 나라를 사랑한다면 이제 남은 오직 하나의 길은 혁명공약을...
구술 컬렉션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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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섭
면담자 : 이병호
일자/장소: 2022.8.31. / 민주언론시민연합
요약설명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계엄당국의 언론 통제 아래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보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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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배
면담자 : 차성환
일자/장소: 2021.10.3. / 서울시 종로구 구술자 사무실
요약설명 : 경험, 4·19와 5·16의 경험, 서울대 사학과 입학과 한일회담반대투쟁, 강제징집,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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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종
면담자 : 김선미
일자/장소: 2003.09.06 / 민족자주평화통일부산회의 사무실
요약설명 : - 5·16 군사쿠데타 이후 피신 관련 경험담 - 현 국제 정세 하에서의...
일지사료 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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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이케다 회담에서 대한국교정상화 촉진
일자 : 1961.6.25
분류 : 한일협정추진 > 일본
요약설명 : 일본에 책임분담 압력이 가중되었다. 케네디 정권은 경제부흥에 성공한 일본이 후진국에서 군사적·경제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대한정책에서 경제개발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함에 있어 일본 자본과 대일 수출시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미국의 한일관계정상화 압력은 1950년대보다 더욱 강화되었다.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장면 정권을 붕괴시키고 집권한 박정희는 정통성 없는 정권의 운명을 경제개발에 걸었다. 그 역시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 으로 나섰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2일 박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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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당, “한일회담 지속하면 난동사태 날 것”
일자 : 1961.11.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해외 및 북한
요약설명 : 순항하기 시작하였던 5·16쿠데타 이후였다. 당시는 중소분쟁과 조소갈등으로 북방 3각 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한일회담은 북한에 긴장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남북한의 태도는 서로 판이한 차이가 있었다. 한국정부는 한일관계의 정상화 전에 정치, 경제적인 기본사항의 타결을 추구하는 데 비하여, 북한 측은 대일관계의 개출구로서 통상 및 문화교류를 제1단계로 보고 점진적인 자세를 취해왔다.(정기원, 「‘두 개의 한국’관을 경계한다-일본과 북한의 교섭관계」, 『사상계』, 1964년 12월호, 115~118쪽) 북한은 한일회담이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삼각동맹을 구축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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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 “다소 불만 있더라도 한일국교를 성취할 것”
일자 : 1962.12.27
분류 : 한일협정추진 > 한국정부
요약설명 : ‘경제협력’방식의 선택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의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포기하고 ‘수출지향형 공업화 전략’을 새롭게 선택하게 되는 경제재건 전략의 전환점에서 이루어졌다. 즉, 일본으로부터 ‘경제원조’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일본의 경제침투에 대한 위험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원조를 통제한다는 신중론을 포기하고 일본의 ‘경제원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수출지향형 공업화 전략’을 공식화, 구체화시킨 사건이었다. 이렇게 ‘김종필-오히라 합의’는 한일 간의 청구권문제에 관한 논쟁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것이고, 이후 청구권문제에 관한 논의는 ‘경제협력’논의로 변화되었다.(오오타 오사무, 『한일교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