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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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힘
등록번호 : 00871013
날짜 : 1985.09.05
구분 : 문서류 > 단행본
기증자 : 강신오
요약설명 : 이달의 역사-6.3사태 교양교실: 민중과 민주주의, 노동법과 노동자 만화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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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1964년도 2/4분기]
등록번호 : 00105767
날짜 : 1964.06.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우리가 처한 일반적 상황 : 3.24사태, 6.3사태 2/4분기상황과 사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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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배 송암교회 본당 난입 사건 경위서(1983년 6월 3일)-폭력으로 짓밟힌 성전
등록번호 : 00484510
날짜 : 1983.06.04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요약설명 : 1983년 6월 3일 '6.3사태 기념 강연회'가 끝난 후 폭력배가 송암교회에 난입함
사진사료 1건
더 보기민주화운동사 컬렉션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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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
요약설명 : 와 생산자 미상의 결의문 <일본 예속으로 직행하는 매국적 한일굴욕회담을 전면 중지하라!> (등록번호 : 578372)가 있으며, 6.3동지회가 생산한 <6.3 포럼 창간호> (등록번호 : 161613) 등으로, 문서사료는 많지 않다. 이에 비해 사진사료는 비교적 풍부하며 주로 경향신문사 생산사료들이다.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굴욕회담으로 규정, 전국적 반대 운동의 시발점이 된 6.3 운동 당시 모습> (등록번호 : 723198), <한일회담 결사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선 서울대학교 학생들> (등록번호 : 742493), <서울 시내에서 열린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연행해가는 경찰들> (등록번호 :74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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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요약설명 : 이 사건과 관련하여 판결문, 도예종의 항소이유서, 신문스크랩, 사진 등 6건의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사건의 발생과 진행과정은 신문스크랩 <인혁당사건관련 자료모음>(등록번호 : 492089)을 통해서 볼 수 있으며, <1차 인혁당 사건 판결문>(등록번호 : 534960)을 통해 박정권의 인혁당 사건 조작 시도가 여실히 무너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인혁당 사건 공판에서 피고자 도예종 등 13명 모습>(등록번호 : 709842)에서는 1차 인혁당 관련자의 면면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1차 인혁당 사건의 시발이 되었던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관련하여 145건의 사진이 소장되어 있다.
사료 콘텐츠 1건
더 보기구술 컬렉션 8건
더 보기일지사료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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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민비연 수사결과 발표, “민비연은 반국가단체”
일자 : 1967.7.25
분류 : 분류없음 > 정부·여당
요약설명 :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의 제2차 송치 피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끝내고 6.3사태 당시의 데모 등에 관련됐던 전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과 학생들의 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를 반국가단체로 단정, 이번 적화공작단 사건의 수사가 일단락되는 대로 민비연 전체회원에 대한 일제수사를 벌이기로 했다. 25일 오전 서울지검 공안부 이종원 부장검사는 민비연 관계자들의 구속기소를 밝히는 자리에서 민비연의 수사결과를 이 같이 밝히고, 아직 입건수사를 받지 않고 있는 민비연의 전 회원 46명에 대해 일제수사를 벌여 그 중 민비연이 반국가단체라는 점을 알면서도 가입했거나 가입 후 주동적인 역할을 한 자들은 모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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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민권쟁취단 성토대회 개최
일자 : 1971.6.4
분류 : 분류없음 > 학생
요약설명 : 경 대강당 앞에서 6.3사태 기념 성토대회를 갖고 “정부당국은 서울대의 휴업령을 즉각 철회하고 서울대 당국자는 학생처벌을 즉시 백지화하라”고 주장했다.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의 주최로 열린 이날 성토대회는 결의문 채택에 이어 “휴업령은 파시즘”이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가두시위에 들어갔으나 굴다리 앞에서 대기 중인 200여 명의 기동경찰대의 최루탄과 페퍼포그의 저지로 1시 반경 자진 해산했다. 한편 이날 발표된 제6차 시국선언문에서는 “현 정권의 친일파쇼무드는 반민족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며, 현 정부는 학원세력을 말살하려고 있다”고 역설했다.『동아일보』 1971.6.4. 7면; 『경향신문』 1971.6.4.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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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장관 “인혁당 관계자를 민주인사로 지칭하면 엄단”
일자 : 1975.2.24
분류 : 정치·국제관계 > 정부·여당
요약설명 : 후 월북했고, 그 뒤 김배영이 남파돼 활동하다가 또다시 월북했고, 1964년 이른바 6.3사태로 인혁당의 조직과 활동상황이 드러났으나 주모자인 김상한, 김배영 등이 월북했었기 때문에 당시 관련자들은 고문에 의한 조작설을 퍼뜨리며 경미한 형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황장관은 “1967년 북괴간첩김배영이 재차 남파됐다가 검거돼 인혁당의 진상이 뒤늦게나마 입증되기는 했으나 이미 그때는 재판이 끝났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정부도 어찌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은 1973년 10월 이후 학원소요사태와 유류파동으로 인한 경제불황 등으로 인심이 소란한 것을 틈타 개헌청원 서명운동 등으로 사회에 혼란을 불어넣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