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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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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한명희
면담자
이영재, 정호기, 이소영
구술일자
2019. 7.4(1차), 7.5(2차)
구술장소
4.9통일평화재단
구술시간
312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73. 3. 한국콘트롤데이타 입사 

1977.~1980. 한국콘트롤데이타 노조 부위원장

1980.~1982. 한국콘트롤데이타 노조 위원장

1985.~1988.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사무국장, 서울지역 회장

1987.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 겸 노동위원장

1990.~1992 한국여성노동자회 회장

1998.~현재 한국여성노동자회/서울여성노동자회 이사

2003.~2008. 한국여성재단 이사 

2010.~2018. 서울시 8대, 9대 시의원

2018.~현재  ‘고령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한 여성연합’ 대표

구술내용 요약

한명희는 1952년 부산시에서 출생했다. 구술자 가족은 1962년경 상경하여 아현동에 거주했으나, 재개발로 철거되면서 재산을 거의 상실했다. 가족은 홍은동으로 이사했고, 구술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2년 동안 이종사촌 가족의 보모로 생활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계속되자, 1965년경 동생 2명과 함께 아버지 고향인 전라남도 나주군에 소재한 금성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금성원은 고아원이었는데, 친척이 총무를 맡고 있어 3년 동안 지낼 수 있었다. 구술자는 이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21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68년경 상경하여 숭의여고를 다니며 급사생활을 했다. 

한명희는 1973년 3월 친구의 소개로 콘트롤데이타에 입사했다. 미국계 회사에 다니는 것은 생산직 여성 직업으로서는 양호한 편이었으나, 가족에게는 생산직이 아닌 사무직이라고 둘러댔다. 구술자가 입사한지 약 6개월 만에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구술자는 노동조합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이른바 ‘멋쟁이’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받게 되면서 노동자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한명희는 1977년 반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두 가지를 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당시 지부장은 박명자였다. 박명자는 영등포산업선교회와 관계를 맺고 지부장으로 선출되었으나, 1977년경에는 노동조합을 민주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 이영순의 의견을 받아들여 박명자 체제가 다시 들어서기는 했으나, 약속과 달리 박명자는 지부장을 사임하고 사직하지 않았다. 이에 지부장 불신임운동이 벌어졌고, 이영순이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렇지만 박명자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이른바 ‘반조직’을 결성하여 다방면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이 과정에서 구술자는 부지부장에 선임된다.

이영순과 한명희 집행부는 통근버스 이용을 둘러싼 남녀 노동자의 갈등, 임금인상률, 결혼퇴직 반대운동, 임산한 이후에도 계속 근무하기, 노동시간 단축운동 등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1980년 5월 9일에는 금속연맹 민주화투쟁을 전개했으며, 5월 13일에는 노동3권 보장 궐기대회를 전개했다. 그렇지만 이영순과 한명희는 1979년부터 노동조합의 운영방식과 활동을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노동계 정화조치 당시 콘트롤데이타 노조 상황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