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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민주화요구 시위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 한방으로 절대권력자 박정희가 사라진 뒤 권력내부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군부내에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힘 의 중심이 형성되면서 최규하 정부는 과도정부로서의 역할조차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유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13일 해직교수협의회, 동아.조선투위, 민주청년협의회, 자유 실천문인협회, 민주청년협의회등 5개단체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란 성 명을 통해 유신체제의 조속한 청산과 민주회복, 새로운 민주헌법의 3개월 내 제정 등을 주장하며 국민저항의 깃발을 올렸다. 15일 기독청년협의회(EYC)는 기독청년민주화선언을 발표, 유신잔재의 일소와 거국내각 구성, 종교. 언론. 학원 자유의 보장 등을 요구했고 , 같은 날 민주주의와 학원자유화를 위한 전국대학생협의회, 학생회부활준비위원회도 새 헌법제정과 해직교수 복직, 학원 자율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는 성명 을 냈다. 22일과 23일에는 같은 주장으로 서울대 관악캠퍼스와 서울농대에 서 시위를 벌여 4명이 구속되고 6명이 수배됐다. 그리고 24일 오후. 재야 민주화세력들은 명동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위장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같은 달 26일 고려대 15개 서클의 학원민주화 선언발표, 28일 광주 신. 구교 및 재야 민주화운동 6개 단체의 민주화를 향하여 함께 나가자는 성 명발표 및 계엄군과의 충돌, 30일 전남대생 2천여명은 군의 중립을 요구하며 시위, 12월 5일 전북대생의 유신잔당 퇴진요구 시위 등 학원가는 박정희 사망이후 관망태세에서 벗어나 민주화 투쟁의 불을 지피기 시작 했다.
소위 ‘서울의 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