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컬렉션
14대 15대 대선
제14대 대통령선거는 1992년 12월 18일 실시됐다. 김영삼은 내각제 파동과 박철언 등과의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특유의 오기와 배짱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민주당에서는 김대중이, 국민당에서는 정주영이 출마했고, 1987년 대통령선거 때 후보단일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한 백기완도 출마했다. 선거 결과 김영삼이 김대중을 194만 표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후보별 득표율은 민자당 김영삼 후보 41.4%, 민주당 김대중 33.4%, 국민당 정주영 16.1%, 신정당 박찬종 6.3%, 백기완 1.0%였다. 14대 대선은 집권세력의 완승과 제도권 야당들의 패배, 그리고 진보적 민주진영의 실패로 마감됐다. 김영삼 후보는 ‘신한국 건설’을 캐치프레이즈로 국민들의 안정희구 심리를 파고들어 부산기관장대책회의 파문, TV토론 회피 등 선거운동과정의 열세를 만회하고 승리했다. 김대중 후보는 ‘뉴 DJ' 플랜과 합리적 정책 제시 등 유세과정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정주영 후보는 거대한 조직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초반에 바람을 일으켰으나, 금권선거 시비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은데다 자생력 부족으로 좌초했다.
선거에 앞서 1월 20일 각종 시민단체로 구성된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가 조직돼 본격적인 선거 감시활동에 들어갔다. 공선협은 불법?부정?타락선거운동 고발, 유권자의 올바른 후보에 대한 투표, 유권자의 적극적인 선거참여 유도 등을 중점 추진방향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 선거는 1970-80년대 이 나라 야당의 양대 지도자가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감정이 극에 달했다. 선거를 불과 4일 앞둔 12월 14일 발생한 초원복집 사건은 지역감정의 극치였다. 지역감정은 대부분 김영삼 쪽에 의해 조장됐다. 이것은 32년만에 성립한 민간정부의 수치였다.
제15대 대통령선거는 1997년 12월 18일 실시됐고, 여느 대통령선거보다 공정한 분위기 아래 진행됐다. 김영삼의 탈당으로 집권당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권은 통합돼 김대중 단일후보로 맞섰고, 여권은 분열돼 이회창, 이인제 두 명의 후보가 나왔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뤘고, ‘수평적 정권교체론’을 부각해 당선됐다. ‘3김 청산’을 내세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세대 교체’를 들고 나온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 등 여당 후보의 병립은 김대중 후보에게 유리한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15대 대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측을 불허하는 치열한 경합을 보였다. 선거 결과는 단일후보 김대중의 39만 표차 승리였다. 김대중 후보가 유효투표의 40.3%를 획득해 38.7%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눌렀다. 선거 결과의 최대 특징은 표의 ‘동서 현상’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회창 후보가 한반도의 동부지역에서, 김대중 후보는 서부지역에서 상대 후보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역주의적 선거행태로 인해 노동계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국민승리21 후보는 1.2% 득표율의 지지를 받는데 불과했다.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로 여야 간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제15대 대선에서는 한국 선거사상 최초로 후보자간 TV토론이 실시됐다.
선거에 앞서 1월 20일 각종 시민단체로 구성된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가 조직돼 본격적인 선거 감시활동에 들어갔다. 공선협은 불법?부정?타락선거운동 고발, 유권자의 올바른 후보에 대한 투표, 유권자의 적극적인 선거참여 유도 등을 중점 추진방향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 선거는 1970-80년대 이 나라 야당의 양대 지도자가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감정이 극에 달했다. 선거를 불과 4일 앞둔 12월 14일 발생한 초원복집 사건은 지역감정의 극치였다. 지역감정은 대부분 김영삼 쪽에 의해 조장됐다. 이것은 32년만에 성립한 민간정부의 수치였다.
제15대 대통령선거는 1997년 12월 18일 실시됐고, 여느 대통령선거보다 공정한 분위기 아래 진행됐다. 김영삼의 탈당으로 집권당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권은 통합돼 김대중 단일후보로 맞섰고, 여권은 분열돼 이회창, 이인제 두 명의 후보가 나왔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뤘고, ‘수평적 정권교체론’을 부각해 당선됐다. ‘3김 청산’을 내세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세대 교체’를 들고 나온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 등 여당 후보의 병립은 김대중 후보에게 유리한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15대 대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측을 불허하는 치열한 경합을 보였다. 선거 결과는 단일후보 김대중의 39만 표차 승리였다. 김대중 후보가 유효투표의 40.3%를 획득해 38.7%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눌렀다. 선거 결과의 최대 특징은 표의 ‘동서 현상’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회창 후보가 한반도의 동부지역에서, 김대중 후보는 서부지역에서 상대 후보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역주의적 선거행태로 인해 노동계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국민승리21 후보는 1.2% 득표율의 지지를 받는데 불과했다.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로 여야 간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제15대 대선에서는 한국 선거사상 최초로 후보자간 TV토론이 실시됐다.
갤러리
- 사진 저작권 안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각각의 저작권자로부터 사용권을 획득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 서비스 이용 외에 무단전재 또는 재배포로 인한 명예훼손, 초상권 침해, 재산상의 피해 등이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사진 사용 안내
- 생산자 및 기증자가 ‘박용수’인 사진의 사용은 구매신청을 클릭하여 직접 사진 구매 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생산자 및 기증자가 ‘경향신문사’인 사진의 사용은 경향신문사 담당자(02-3701-1635)를 통해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생산자 및 기증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담당자( sunny@kdemo.or.kr / 031-361-9539 )에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