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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군부와 미국의 책임을 묻는 저항은 1985년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투쟁으로 이어졌다. 5월 23일 12시경 삼민투 산하 73명의 학생들이 일시에 미문화원에 진입, 2층 도서관에서 워커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감으로써 나흘 동안 점거 농성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나”라는 성명서에서 현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철회하고 한미관계의 올바른 정립을 촉구하였다. 정부는 농성과 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반미는 좌경용공’이라고 규정했고 학생운동은 ‘반미는 아니다’라는 수세적 입장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학생운동 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의 하나로 기억되면서 전학련, 삼민투 관련자들은 ‘학생운동 스타’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은 미국의 광주학살개입이라는 문제의 핵심 고리를 강타함으로써 반미의식을 확산시키는 이정표가 되었다. 경찰은 점거농성이 시작되자 기자와 학생 가족들의 출입만 허용했다. 가족들은 학생들에게 자진해산을 종요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미국의 답변을 듣지 않고서는 해산할 수 없었다. 기자들과의 문답은 육성이나, 종이에 글씨를 크게 써서 보여주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미국과의 대화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자 25일부터는 단식농성 중이던 학생들 중 일부가 탈진하기 시작했다. 정권의 좌경용공 공세도 강화되었다. 시위장 주변에 우익세력의 항의도 간혹 있었지만 제지되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농성이 남북관계(27일 남북적십자 회담)에 악용당할 것을 우려한 학생들은 26일 새벽 전격적으로 정오에 농성을 해제할 것을 발표한다. 농성을 유지해도 미국의 입장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고, 또 광주문제를 이슈화하는데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26일 정오 학생들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앞세우고 미문화원을 나와 경찰버스에 올라탔다. 이로써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은 발생 72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