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1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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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사 모음-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어찌갈꺼나 사랑의 띠 새 사막에 꽃 피어 광복군 ...
등록번호 : 00042123
날짜 : 미상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이정순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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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돈만 벌어라, 전태일추모가, 전진하는오월 등의 민중가요]
등록번호 : 00367985
날짜 : 198*.00.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
요약설명 : 전태일추모가, 전진하는 오월, 광복군석탄가, 돈타령(I),해야솟아라,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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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들을 위한 노래, 전진을 위한 노래]
등록번호 : 00529387
날짜 : 미상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장준영
요약설명 : 노동해방가, 광복군 석탄가, 흔들리지 않게, 우리 승리 하리라 전진을 위한 노래 - ...
민주화운동사 컬렉션 1건
더 보기사료 콘텐츠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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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요약설명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장준하 선생의 삶은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한 길과 같은 것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유신시절 그는 ‘재야 대통령 장준하’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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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의 생애를 바꾼 세 친구
요약설명 : 바로 장준하였다. 장준하는 일본 학도병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장장 6천 리의 대장정을 거쳐 광복군에 들어간 독립투사였다. 일본 만주국 황군 출신으로서 관동군에 배속돼 친일에 앞장섰던 박정희와는 모든 것이 대조되는 인물이었다. 이태 전인 1973년 12월 24일, 장준하는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을 발표하며 박정희 대통령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또한, 잡지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민주 회복을 위한 이론적 논거를 제공하며 유신체제를 매섭게 질타했다. 박정희는 그러한 장준하를 늘 두려워했고,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아! 나의 벗 장준하! 그대가 기어이 박정희 정권의 제물이 되고 말았는가?” 오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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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장한 출정식 이야기 - 독립군 무명용사의 묘에서
요약설명 : 일대 묘역을 정비하면서 광복군합동묘소라고 이름짓고 1940년에서 1945년 사이에 만주일대에서 순국한 17위의 독립지사를 모셨는데, 원래 1967년 광복군동지회에서 처음 이 묘를 조성할 때는 이름없이 순국한 수많은 독립 무명용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그만 묘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창립은 1980년 광주항쟁을 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대해 처음으로 저항의 횃불을 든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때 민청련 창립의 주역이었던 김근태를 비롯하여 장영달, 박계동 등 집행부원들이 창립대회를 앞두고, 이 무명용사묘에 와서 참배하고 결의를...
구술 컬렉션 2건
더 보기일지사료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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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민주구국동지회’ 결성
일자 : 1960.5.22
분류 : 통일운동과 혁신계활동 > 혁신계활동
요약설명 :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선출하였다. 위원장에는 상해 임시정부 출신의 안경근이, 부위원장에는 광복군 출신인 권계환과 문창호 등이 선출되었다.『영남일보』 1961. 1. 29 조3면. 『영남일보』에 의하면 민주구국동지회는 결성된 후 약 800명의 규모를 지닌 단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민주구국동지회를 주도하던 인사들이 1960년 11월 중순에 발족한 민족통일경북연맹에 가맹하면서 민주구국동지회의 활동은 크게 줄어들었다. 기사가 실린 1961년 1월 29일 현재 민주구국동지회는 크게 두 개 분파로 나뉘었다고 한다. 『영남일보』에 의하면 민주통일경북연맹과 전국에 약 80명뿐이라는 광복동지회의 두 개 분파로 갈렸다고 한다(『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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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자 및 광복군 동지, 한일협정비준 관련 성명서 발표
일자 : 1965.8.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광복군 동지 137명은 한일협정비준과 관련하여 성명서를 발표했다.『동아일보』 1965.8.7 석2면성명서정계는 물론 국내 각계에서 한일협정의 국회비준을 위요하고 비상한 관심과 찬반의 양론으로 국내정계를 우려할 만한 사태로 몰아넣고 있는 이때에 우리 동지들은 40여 성상을 항일운동에 생애를 초개같이 버리고 반일하여 조국광복독립투쟁 하던 입장에서 좌시할 수 없어 우리의 의사를 전국 동포에게 피력하는 바이다. 우리나라 독립 후 장장 15년을 끌어온 국제사상 보기 드문 한일 간의 외교 교섭은 자유당정권 시부터 민주당정권을 거쳐 이제 제3공화국에 와서야 정조인되어 국회비준에 이르렀다. 오랜 일제의 폭악무도한 압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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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홍일을 신임 당수로 선출
일자 : 1971.7.21
분류 : 분류없음 > 재야·야당·지식인·종교인
요약설명 : 당수의 약력이다. ▲평북 용천 출신(73세) ▲중국 귀주육군강무학교 및 중국육군대 졸업 ▲중국국민혁명 동로군 사령부 참모 ▲한국광복군 사령부 참모장 ▲1군단장 ▲육군종합대학 총장 ▲중장 예편 ▲주중대사 ▲최고회의 고문 ▲외무장관 ▲신민당 서울 마포구당 위원장 ▲7대 의원 ▲신민당전당대회 의장 ▲신민당 당수 권한대행.『동아일보』 1971.7.21. 1면; 『경향신문』 1971.7.21. 7면; 『한국일보』 1971.7.22. 1면; 『조선일보』 1971.7.22. 1면; 『중앙일보』 1971.7.21. 1면; 『매일신문』 1971.7.22. 1면; 『국제신보』 1971.7.21. 7면; 『영남일보』 1971.7.22. 1면; 『충청일보』 1971.7.22. 1면; 『민주전선』 1971.7.31.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