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58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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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민주 구국선언을 지지하고 모든 정치범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 서...
등록번호 : 00981937
날짜 : 1976.06.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고다 사또루
요약설명 : 민주구국선언은 국내외 한국인은 물론 전 세계 양심적인 사람들과 여론의 압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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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민주구국선언 지지 전 정치범을 즉시석방하라
등록번호 : 00982426
날짜 : 1976.06.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고다 사또루
요약설명 : 위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김대중, 윤보선 등의 민주인사들에게 박정희 정권의 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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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구국선언 관련 요청서]
등록번호 : 00982430
날짜 : 1976.06.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고다 사또루
요약설명 : 민주주의와 박정희 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 발표자들에 대한 박정희...
사진사료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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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김지하가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3월1일 민주구국선언을 지원한 사람들
등록번호 : 00430505
날짜 : 1975.00.00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이종옥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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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타오르는 3.1민주구국선언" 출전 기념회에 참석해 기도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내...
등록번호 : 00725681
날짜 : 1998.02.12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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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5.4 김대중 석방운동" 사진
등록번호 : 00960047
날짜 : 1976.05.04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한신대학교
요약설명 : 민주구국선언을 계기로 결성된 양심범가족협의회 관련,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와...
박물사료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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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민주구국선언 구속자석방 시위용 부채 (6891 이해동)
등록번호 : 00973683
날짜 : 미상
구분 : 문서류 > 박물
기증자 : 이종옥
요약설명 : 6891 이해동이라고 적혀있는 3.1민주구국선언 구속자석방 시위에서 사용한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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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구속자를 돕기위한 메달형 목걸이]
등록번호 : 00579347
날짜 : 1976.00.00
구분 : 문서류 > 박물
기증자 : 김성재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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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구속자를 돕기위한 반지]
등록번호 : 00579348
날짜 : 1976.00.00
구분 : 문서류 > 박물
기증자 : 김성재
요약설명 :
민주화운동사 컬렉션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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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민주구국선언 사건(명동 사건)
요약설명 : 대한 입장 성명서>(등록번호 : 419778), <출옥인사들의 출옥성명서>(등록번호 : 105732), <3·1민주구국선언사건 피고들의 김대중씨 석방요구 성명서>(등록번호 : 444414) 등이 있다. 일명 제2명동사건과 관련하여 <3·1절 기도회사건에 대한 결의문>(등록번호 : 527450)이 있다. 특히 3.1민주구국선언사건 가족들은 정권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재판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박용길 장로께서 당시 활동에 사용한 보라색 옷(등록번호 : 033709), 시위에 둘렀던 메달(등록번호 : 033707), 어깨숄(등록번호 : 057144), 반지 등 여러 점의 박물류 사료를 기탁하여, 역사전시회 등을 통해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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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요약설명 : 1974년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의 <민중 민족 민주선언>(등록번호 : 480510)으로, 당시 학생운동의 사상적 수준을 보여준다. <민중 민족 민주선언>은 “소위 유신이란 해괴한 쿠데타 국가 비상사태와 1.8 조치 등으로 이어진 폭압체제”라고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남북대화는 영구집권을 위한 장식물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7.4공동선언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민생, 민권, 민중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료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민중 민족 민주선언>은 원본이 아니라 독일에서 발간된 신문에 결의문이 생략된 채 부분 개제된 것이다. 1973년 4월 3일 이화여자대학교 명의의...
사료 콘텐츠 1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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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_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요약설명 : 민주구국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하고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유난히 눈에 띄는 한 분이 있었다. 하얀 수염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훤칠한 이마의 노인. 바로 함석헌 선생이었다. “피고들은 3·1절 기념미사가 거행된 명동성당에서 민주회복이라는 명목 아래, 소위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여 청중을 선동하여 시위를 촉발시킴으로써 민중 봉기를 확산하고, 나아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이를 이용하여 현 정부를 전복, 정권을 탈취할 것을 획책하였다.” 판에 박힌 검사의 논고와 또한 판에 박힌 판사의 결심. 팔순을 바라보는 사상가이자 ‘겨레의 할아버지’ 함석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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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민주구국선언-유신반대운동의 불꽃
요약설명 : 박정희는 자신의 정적 제1호인 김대중이 ‘3·1민주구국선언’(3․1선언)의 서명자로 가담하자, 이를 철저히 억압해서 민주화운동 세력에 위해를 가하는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박 정권의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신 · 구교를 포함한 종교계에서는 ‘3·1선언’이 정당하다는 성명을 연달아 발표했다. NCC 인권위원회에서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인해 구속된 인사들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다. 중앙정보부는 이 기도회를 개최한 조남기 목사를 비롯해 5명을 연행하는 등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사건 이후 서울대, 이화여대, 한양대, 중앙대 등 대학가에서는 ‘3·1민주구국선언문’을 복사해 일제히 뿌리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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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문(電文)에 나타난 3.1민주구국선언
요약설명 : 3.1민주구국선언 1972년 10월유신으로 유신체제가 들어선지 4년 뒤인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한 문건이 낭독된다. 3.1민주구국선언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초헌법적 비상조치로 발단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저항의 외침이었다. 문익환은 1976년 2월 12일 함석헌에게 유신반대에 관한 "민주구국선언문"을 작성했다고 밝혔다. 함석헌은 3월 1일 이 선언문을 낭독하겠다는 문익환에게 그 뜻에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미사가 끝나자 2월 16일 전주에서 있었던 기도회의 보고형식을 빌려 이우정 교수가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구술 컬렉션 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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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희
면담자 : 박원순
일자/장소: 2002. 9. 7.(1차), 10. 5.(2차)/아름다운재단 박원순 변호사 사무실
요약설명 : 사건, 민주구국선언 사건, 이영희교수 필화사건, 동일방직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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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우
면담자 : 박원순
일자/장소: 2002. 9. 7.(1차), 10. 5.(2차)/아름다운재단 박원순 변호사 사무실
요약설명 : 사건, 민주구국선언 사건, 이영희교수 필화사건, 동일방직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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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명
면담자 : 박원순
일자/장소: 2002. 9. 7.(1차), 10. 5.(2차)/아름다운재단 박원순 변호사 사무실
요약설명 : 사건, 민주구국선언 사건, 이영희교수 필화사건, 동일방직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일지사료 9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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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민주구국동지회’ 결성
일자 : 1960.5.22
분류 : 통일운동과 혁신계활동 > 혁신계활동
요약설명 : 모인 가운데 ‘민주구국동지회’가 결성되었다. 이날 결성식에서는 시국선언 및 결의문을 채택·발표하고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선출하였다. 위원장에는 상해 임시정부 출신의 안경근이, 부위원장에는 광복군 출신인 권계환과 문창호 등이 선출되었다.『영남일보』 1961. 1. 29 조3면. 『영남일보』에 의하면 민주구국동지회는 결성된 후 약 800명의 규모를 지닌 단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민주구국동지회를 주도하던 인사들이 1960년 11월 중순에 발족한 민족통일경북연맹에 가맹하면서 민주구국동지회의 활동은 크게 줄어들었다. 기사가 실린 1961년 1월 29일 현재 민주구국동지회는 크게 두 개 분파로 나뉘었다고 한다. 『영남일보』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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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대회 거행, 통일방안 등 결의
일자 : 1961.2.25
분류 : 통일운동과 혁신계활동 > 통일운동
요약설명 : 등은 사회당·혁신당 일부·사회대중당·동학당 일부·광복동지회·구국동지회·민족건양회·민주민족청년동맹·통일민주청년동맹·천도교 일부·유도회 일부·4월학생 혁신연맹·피학살자유족회·출판노조 일부·교수협회 일부·사회문제연구회 일부·기타 등이다(『민족일보』 1961. 2. 25 1면).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는 “정당·사회단체 및 개인으로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3.1 독립정신에 입각한 민족자주통일 달성”을 위해 노력할 것을 선서하였다.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방안으로 ①남북 간의 서신왕래, ②경제교류, ③신문기자와 시찰단 교류, ④국제적인 경기대회에 남북 혼성선수단 파견 등을 결의하였다. 또한 ①일체의 외세배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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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정당 및 각 사회단체 참여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 결성 한일회담 즉각 중지 요...
일자 : 1964.3.9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9일, 민정·민주·자민·국민의 당·한독당 등 5개 정당대표들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언론계 대표 및 저명인사 200여 명은 정부 여당의 대일 저자세외교를 저지시키려는 투쟁기구로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박정희 정권의 대일굴욕외교를 분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날 하오 서울 종로예식장에 모인 투쟁위는 구국선언문(윤보선민정당 대표 최고위원 낭독)과 경고문(박순천민주당 총재 낭독)을 채택하고 투쟁위 기구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반대하는 야당의 강경태도는 처음으로 공식화됐으며, 그 기세를 전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