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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원
장수원은 1956년 5월 경북 영양군에서 출생했고, 중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시기에 가족 전체가 안동으로 이사했다. 2년 후 다시 대구로 이사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5년 경북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76년 3월 언어문화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1977년에는 언어문화연구회의 후신인 복현독서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들은 1977년 4월 19일 4월혁명 기념행사를 계획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977년 11월 1일에는 경북도 학도호국단 검열일에 시위를 벌이려 했으나 다시 좌절한다. 1978년 11월 2일 경북대 시위, 즉 1차 민주구국선언을 전개하여 당일 연행되고 11월 7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들이 구속된 날 경북대에서는 2차 민주구국선언 시위가 일어났다. 1979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으나, 사건이 발발한 직후 제적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장수원은 활동과 수감 그리고 석방 후 후유증이 컸다. 우선 구속되어 있던 동안 동생이 같은 동아리에 가입했고, 민주화의 봄 국면에 수감되었다. 화원교도소에 감금된 상태로 북부경찰서에 호출되어 물고문을 수차례 받았다. 민주화의 봄 국면 학내외 시위에 참여했으나, 용케 예비검속을 면했다. 1980년 8월에 경북대를 졸업했고, 1982년 3월에 교사로 임용되었다. 복권된 시점은 1984년 8월 15일이었다.- 경북 영양에서 출생, 어려운 가정 형편, 한국전쟁 시기 부모님의 결혼과 경북 영양 일대의 상황- 중학교 3학년 때 가족 전체가 경북 안동으로 이사, 2년 후 대구로 이사, 대구에서 어렵게 공부- 1975년의 경북대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배경- 경북대 동아리 언어문화연구회, 경북대 함종호와의 인연- 복현독서회, 언어문화연구회, 여정남 등 경북대 주요 인물들, 복현독서회의 활동- 1977년 4월 19일, 경북대 시위 미수- 1977년 11월 1일, 경북대 학도호국단 검열일 시위 미수- 1978년 11월 2일, 경북대 시위(제1차 민주구국선언)- 1978년 11월 7일, 제2차 민주구국선언- 5‧18민주화운동 국면에 수감된 남동생, 1979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석방-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은 사전에 인지하지 못함, 석방 후의 후유증- 1980년 2월 29일 복권과 민주화의 봄 국면, 1980년 5월 예비검속에서 연행된 사람들-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 경북대 학생운동- 1980년 8월 졸업과 교사 임용, 1987년 6월항쟁 전후의 상황- 구술면담의 주제에 대한 평가와 현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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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문 [대통령 직선제 개헌 관련]
대통령 직선제가 가장 빠른 민주화의 방법이고 내각제 주장은 영구집권음모로써 협의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데 합의했다는 것, 민주화 요구에 대해 국민에게 오해가 없도록 할 것을 다짐했다는 것, 직선제 개헌의 관철을 위해 신한민주당이 재야 등 이 나라 모든 민주세력과 굳게 연대하여 투쟁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