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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
사업개요
-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 1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2차년도 과제인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는 1970년대 민주노조의 결성 경위와 활동 성과를 파악하고, 1980년 신군부가 단행한 ‘정화조치’의 실상을 관련자 구술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 자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 노동운동가와 지원 조직의 활동 및 삶을 고찰함으로써 기존 생산된 자료나 연구 성과의 사실관계를 재규명하고, 5·17 이후 정화조치가 각 사업장에서 작동한 방식과 그 구체적인 피해 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나아가 과거의 활동이 당사자들의 이후 생애와 인식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70~80년대 노동운동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조명하고 관련 사건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이총각
- 면담자
- 이영재, 정호기
- 구술일자
- 2018. 6. 22
- 구술장소
- 인천 남동구 청솔의 집
- 구술시간
- 271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66. 1. 18 인천 만석동 소재 동일방직 입사
1969. 지오쎄 활동(투사선서)
1972. 5. 10. 동일방직 최초 여성지부장(주길자) 체제하 쟁의부장
1975. 제2대 이영숙 지부장 체제하 총무부장
1977. 2. 6. 동일방직 제3대 지부장 당선
1978. 3. 명동성당 단식농성
1978. 4. 26 부당해고 항의 주도를 이유로 구속
1980. 5. 정화조치에 의한 피해(수배 및 블랙리스트)
1987.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위원장
1997. 인천노동연구원 원장
- 구술내용 요약
-
이총각은 1947년 11월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1951년 1·4후퇴 무렵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인천시 화수동으로 왔고, 이후 만석동 등에서 살았다. 1966년 1월 18일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동일방직에는 5살 위의 언니가 먼저 입사해 있었다. 구술자는 업무 습득 능력이 우수해 양성에서 원공이 빨리 되었다. 동일방직은 작업의 특성상 먼지가 많은 사업장이었고, 그로 인해 폐결핵을 앓는 사람들이 상당했다. 당시 한국의 산업화 정도로 보면, 동일방직은 매우 큰 사업장이라고 할 수 있었고, 인근 공장에 비해 급여도 좋았다. 하지만 노동 강도가 높았고, 장시간의 노동만큼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동일방직은 일찍이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었으나, 어용노조였다. 구술자는 노동조합에 대해 무관심했는데, 1969년 JOC에 참여하고 투사선서를 하면서 노동조합 민주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2년 5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노동조합 여성지부장이 선출되는데 일조했다. 구술자는 1975년 제2대 여성지부장 시기에는 총무부장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과정에는 회사 측과 결속된 남성 노동자와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충돌이 있었다. 대의원은 매년 새로 선출되었는데, 1976년 7월 회사가 지지하는 고두영 일행은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지부장을 불신임하고, 자신들을 지지하는 대의원들만으로 고두영을 지부장에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제2대 여성지부장과 구술자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여성 노동자들은 일련의 상황에 항의하기 위해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경찰의 진압에 맞서 항거하는 과정에서 소위 ‘나체 시위’가 발생했다. 전국섬유노동조합은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불신임한다는 공문을 내려 보냈으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던 가운데 제2대 여성지부장이 결혼을 하고, 사직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7년 4월 4일 이총각이 제3대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노동조합을 약화 및 어용화하려는 회사 측의 공작은 계속되었다. 여기에 전국섬유노동조합도 가세했다. 1978년 2월 21일 회사 측의 사주를 받은 남성 노동자들이 대의원선거를 방해하고, 이른바 ‘똥물 사건’을 일으켰다. 1978년 3월 6일 대구 수정호텔에서 개최된 본조 중앙회의에서 구술자를 비롯해 4명을 제명 처분한다는 소식을 들은 구술자 일행은 회의장을 찾아 강력히 항의했다. 그리고 3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노동절 대회에 들어가 항의하다 일부는 연행되고, 연행을 면한 노동자들과 외부 노동자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했다. ‘똥물 사건’과 ‘노동절 사건’의 여파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데, 구술자는 29일의 구류를 선고받았다.
회사는 4월 10일 노동자 124명을 해고했다. 전국섬유노동조합은 이들의 재취업을 막기 위해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각 사업장들에 발송했다. 노동자들은 4월 26일 출근투쟁을 전개했는데, 이와 관련해 구술자와 총무는 구속되었고, 다른 노동자들은 불구속되었다. 구속자가 유죄판결을 받고 석방된 것은 9월이었다. 9월 22일 기독교회관에서 ‘동일방직 사건 연극’이 이루어졌고, 바로 농성이 시작되자, 경찰이 진압했다.
구술자는 1979년 3월 20일 크리스찬 아카데미사건에 연루되어 연행, 조사를 받았다. 구술자와 해고자들은 복직투쟁을 계속했다. 특히 1980년 4월 25일에는 한국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농성은 5월 17일 비상계엄으로 확대로 중단되었고, 구술자는 수배 대상이 되었다. 구술자는 정화조치가 실시되던 시기에 도주하여 전국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약 2년에 걸친 수배 생활을 마치고, 구술자는 노동운동에 복귀했다. 1982년 11월 부천노동사목 활동을 시작으로 여러 노동 및 사회단체에 참여했으며, 근래에는 한국헬프에이지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동일방직 조합원 총회를 열면서 겁먹은 노동자들의 기를 살려준 이야기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