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Embed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URL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이메일 공유
천영세
사업개요
-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 2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2차년도 과제인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는 1970년대 민주노조의 결성 경위와 활동 성과를 파악하고, 1980년 신군부가 단행한 ‘정화조치’의 실상을 관련자 구술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 자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 노동운동가와 지원 조직의 활동 및 삶을 고찰함으로써 기존 생산된 자료나 연구 성과의 사실관계를 재규명하고, 5·17 이후 정화조치가 각 사업장에서 작동한 방식과 그 구체적인 피해 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나아가 과거의 활동이 당사자들의 이후 생애와 인식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70~80년대 노동운동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조명하고 관련 사건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천영세
- 면담자
- 이영재, 이창훈
- 구술일자
- 2019. 7. 25
- 구술장소
- 4.9통일평화재단
- 구술시간
- 170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43. 충남 대덕군 출생
1966.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입학, 한모임 결성
1969. 고려대학교 한맥회 회장
1971.-1973.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
1973.-1977. 한국노동조합 총연맹 화학노조 기획실장
1975.-1979.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위원
1979.-1985. 한국노동조합 정책위원
1990.-199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상임지도위원
2000.-2002.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2007. 민주노동당 원내대표
2008. 민주노동당 대표
- 구술내용 요약
-
천영세는 1943년 충남 대덕군에서 출생했다. 고향인 회덕 인근에 위치한 보문중, 보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농촌에서 일을 하느라 다른 동료보다 약 4-5년 늦은 1966년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이미 고교 재학 중 <사상계>를 볼 정도로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 입학 후 몇몇 농촌 관련 동아리를 찾아다녔으나 실망이 컸다. 흥사단에서 주관하는 금요개척강좌에 사상계 필진들이 강의를 하는 것을 수강하러 다니면서 만나게 된 1학년 동료들 40여명이 모여 ‘한모임’을 결성하였다. 김윤환 교수가 한모임의 지도교수를 맡으면서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와도 인연을 맺었다.
1967년 6.8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가 일어났을 때 1학년 입학생들 중 민맥이라는 모임을 구성한 후배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1968년 전국남녀대학생토론대회를 공동으로 주관하면서 두 모임이 결합하여 한맥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 토론대회에서 경북대를 비롯하여 서울대, 전남대 등 전국 대학생들과 유대를 갖게 된다. 구술자는 1969년 한맥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된다. 이 한맥회 모임에서 만든 잡지가 <한맥>이고, 1973년에 이르면 <민우지>를 만들게 된다. 이 한맥회가 1969년 고려대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3선개헌 반대시위를 전개한다.
구술자는 1970년 졸업하고 대전에서 보습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1971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학교로 돌아온다. 구술자는 노동문제연구소에서 <노동문제>라는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박종렬 대신 편집장을 맡게 된다. 1973년 민우지 사건, 일명 NH회 사건이 터지면서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가 집중적인 타격을 입게 되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구술자는 노동현장으로 활동공간을 옮기게 된다. 노동문제연구소와 교육사업을 통해 인연을 맺고 있던 자동차노동조합 지부장 지용택의 도움으로 1973년 자동차노동조합에서 일하다가 1974년 초 화학노동조합으로 옮기게 된다. 화학노동조합 조사통계국장으로 활동하면서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에 참여하였다. 크리스찬아카데미 정규교육인 4박 5일 교육에 참여했고, 노동교육 분야에서 경험하지 못한 프로그램들이 인상적이었다. 프로그램 가운데 촛불의식, 유서쓰기, 노래 보급 등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다. 각 프로그램 마다 다른 분야의 간사들 중 특기가 있는 간사들이 결합하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교육생은 공개적으로 선발했으며, 초기에는 한국노총과도 관계가 좋았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는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산업선교회와 유사한 집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국노총은 강원룡 목사의 독일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노동현장에서 크리스찬아카데미의 교육효과는 크게 나타났다.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이 누적되면서 노동사례연구회 모임이 활성화되었고 이 모임은 임종률이 제안한 프로그램이다. 교육생들이 근무하는 현장을 방문해 상황을 이해하기도 하고, 새로운 내용을 파악하기도 했다.
구술자는 1975년부터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교육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이영희 교수가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공석이 된 교육위원 자리에 이영희 교수의 후임으로 결합하면서다. 당초 노동교육 분야에는 백재봉 교수, 이문영교수, 임종룔 교수, 이영희 교수 등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인 신인령과 임종률은 구술자와 동갑이었다. 산업선교 부분에서는 신인령, 임종률, 구술자의 참여 시간이 많았다.
1979년 10. 26과 1980년 정화조치를 한국노총에서 맞았다. 억압되어 있던 것이 분출되던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서울의 봄이 열리고, 점차 노동자들이 폭발적으로 결합되고 있던 시점에 노동계 정화조치가 일어났다.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을 주도했던 사업장들이 큰 타격을 입었고, 산별노조 상층을 지배하던 어용 간부들 12명도 정화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1980년 12월 31일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이 만들어진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노동계에 정화조치가 내려진 배경 및 전개과정에 대한 설명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