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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률
사업개요
-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 2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2차년도 과제인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는 1970년대 민주노조의 결성 경위와 활동 성과를 파악하고, 1980년 신군부가 단행한 ‘정화조치’의 실상을 관련자 구술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 자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 노동운동가와 지원 조직의 활동 및 삶을 고찰함으로써 기존 생산된 자료나 연구 성과의 사실관계를 재규명하고, 5·17 이후 정화조치가 각 사업장에서 작동한 방식과 그 구체적인 피해 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나아가 과거의 활동이 당사자들의 이후 생애와 인식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70~80년대 노동운동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조명하고 관련 사건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임종률
- 면담자
- 이영재, 정호기
- 구술일자
- 2019. 7. 31
- 구술장소
- 4.9통일평화재단
- 구술시간
- 263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59. 3. 대구 경북고 입학
1962 - 1967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전공
1967 - 1969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석사
1969 - 1976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및 법과대학 조교
1969 - 1976 고려대, 동덕여대, 서울대, 숭실대 강사
1974 - 1979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위원
1976 - 1977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전임강사
1979 - 1982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노동법)
1977 - 1992 숭실대학교 법학과 조교수, 부교수, 교수
1992 - 2009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교수
2000-2003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
2016- 학술원 회원
- 구술내용 요약
-
임종률은 1943년에 출생했다. 해방 후 서울에서 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했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지만, 형제들 모두가 공부에서 두각을 보였다. 1959년 경북고등학교에, 1962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0년 2․28민주의거가 발발한 무렵에는 경북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반장이었다. 임종률도 2ㆍ28민주의거에 참여하여 겨우 연행을 모면했다. 여정남, 윤무한 등이 동기들이었다. 여정남은 잘 몰랐고, 윤무한은 이 시기에도 학생운동으로 유명했다.
특별하게 뜻한 바 있어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한 것은 아니다. 담임선생님이 원서를 썼기 때문이었다. 2학년에는 건강(늑막염)이 악화되어 휴학했으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과외 등 경제 활동을 전전했다. 박현채 선배와 의견을 나누고 경제학과로 전과하려했으나, 건강상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서울대 법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는데, 이영희와 이협 등이 동기들이며, 조영래와 장기표 등은 후배들이다. 1964년에는 건강상 간헐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65년에는 ‘사회법학회’ 회장이 되었다. 그해 5․18연합시위에서 사용된 유인물을 제작했으며, 그해 7월에는 ≪사상계≫에 〈현 한일회담 저지투쟁의 정당성〉이라는 글을 이영희와 공동 집필했다. 이외에도 유인물의 원고를 수차례 작성했다. 6․12시위로 이영희와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다. 50여 명의 학생들이 두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200시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일로 법대 학생회장 장명봉이 구속되었다. 임종률은 20여 일만에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1~2년이 지나 선고유예를 받았다. 이후 발생한 여러 가지 대규모 시국사건들에는 경제활동으로 인해 시간이 없기도 했고,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어 연루되지 않았다.
김치선 교수의 권유와 도움으로 유기천 학장의 반대를 극복하고 1967년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서도 학생운동과 일정하게 관계를 맺었다.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서울대 법학연구소 조교로 근무했다. 1973년 서울대 교수로 발령날 예정이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래서 1976년 경희대 교수로 부임했고, 1977년 숭실대 교수로 이직했다. 1969년에 마치 영화와 같은 사연으로 결혼했다.
1973년경 이화여대 백재봉 교수 소개로 신인령을 만나 크리스찬아카데미 준비 과정에 교육위원으로 합류했다. 신인령, 천영세와는 동갑이었다. 신인령은 백재봉의 석사 제자였고, 임종렬은 노동법을 전공해 백재봉 교수와 안면이 있었다. 이영희는 1975년경 합류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가운데 산업사회분야에 참여했다. 초반에는 4박 5일 교육 모두에 결합했다. 배울 점이 많았다. 프로그램 가운데 촛불의식, 유서쓰기, 노래 보급 등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다. 각 프로그램의 특성을 살려 다른 분야의 간사들이 결합했다. 교육생을 공개적으로 선발했으며, 한국노총과도 관계가 좋았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는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산업선교회와 유사한 집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국노총은 강원룡 목사의 독일 네트워크를 활용하고자 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효과는 실로 컸다. 노동사례연구회 모임은 임종률이 제안한 프로그램이었다. 교육생들이 근무하는 현장을 방문해 상황을 이해하기도 하고, 새로운 내용을 파악하기도 했다.
1976년 경희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크리스찬아카데미 참여 활동은 점차 멀어졌고 소원해졌다. 1979년 3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3월말 혹은 4월이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곤혹을 치렀다. 1980년 6월 혹은 7월경 대학가에 불어 닥친 정화조치로 인해 서울 시내 교수들과 함께 서대문 분소 특수수사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많은 교수들이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지만, 임종률은 보직 사퇴와 해외 출국을 하지 않기로 하고 풀려났다. 1982년 강원룡 목사의 도움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객원교수로 가게 되면서 해외 출국 금지는 풀렸다. 1992년 성균관대학교로 옮겼고, 2000~2003년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근무했다. 오늘날에도 신인령이나 천영세 등을 만나고 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크리스찬아카데미 활동 중 현장방문하여 조합의 실상을 알게 된 이야기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