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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옥
사업개요
- 1980년대 농민운동 2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4차년도 과제인 '1980년대 농민운동' 구술 채록은 2003년, 2004년, 2010년에 진행된 기존 농민운동 관련 채록 성과를 보완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구술 범위는 1980년대 농민운동의 환경, 주요 쟁점, 조직 구조, 교육 및 단체 운영 등을 중심으로 하되, 구술자의 생애적 특성에 따라 1970년대와 1990년대의 활동까지 포괄하여 기록했다. 이번 사업은 상대적으로 기록 정리가 미흡했던 기독교농민운동, 여성농민운동, 그리고 학생운동에서 전환된 농민운동의 양상을 재조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를 통해 농민운동이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점유하는 위상과 영향을 다각도로 규명하고, 그 역사적 가치를 현재적·미래적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는 1차 사료를 확보하고자 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이종옥
- 면담자
- 양라윤, 정호기
- 구술일자
- 2021.6.8.
- 구술장소
- 광주시 동구 구술자 자택
- 구술시간
- 189분
구술컬렉션 > 농민운동 > 80년대 농민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47 경북 영주군 출생
음악 독학, 피아노 수련
1977 남양만(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서 농촌 자녀돌보기 운동 참가
1977 한국가톨릭농촌여성회 (설립) 회원. 신용협동조합 교육 이수
1978 한국가톨릭농민회 부녀부(여성부) (설치) 회원
1978 크리스찬아카데미 여성부문 제1차 교육 이수
1978.12 크리스찬아카데미 농촌여성 제1차 교육 준비, 참가
1979 농민운동가 나상기와 결혼
1984 나상기(남편)가 광주로 내려가서 농민운동. 이후 가족들이 내려옴
1986 농민문제연구소 개소. 전남 등지에서 교육과 조직 활동
1987 전남여성농민회 조직화를 위한 활동에 참여. 준비위원장
1987-90년대 초 피아노학원 경영
1988-1989 전국여성농민조직 활성화위원회 위원장
1989.12.18 전국여성농민위원회 창립. 1991년까지 전남준비위(여농위) 사무국장(총무)
1991.3.9 전남여성농민회 창립. 총무(사무국장). 1992년 부회장
- 구술내용 요약
-
이종옥은 1948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했다. 빈농으로 경제적 형편은 어려웠으나,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나 가족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고학년 교과과정을 깨우칠 정도로 영특했으나, 학교 교육에 재미를 붙이지 못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상계》를 읽으며 자랐고,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해서 피아노 등 악기를 잘 다뤘다. 스물한 살 때,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상경해 해태공장에 취업했으나 열악한 환경과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귀향했다. 교회 여름 성경학교, 주일학교 교사 활동과 강원도 태백에 있는 황지유치원 교사 생활을 잠깐 하고 고향에 내려와 있다가 신문에서 남양만으로 대규모 도시빈민이 이주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갈 결심을 했다.
남양만으로 가서 김진홍 목사를 만나 그곳에서 활동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과 생활협동조합 장기교육을 받았다. 박남식과의 인연도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박남식, 김경자, 허훈순과 함께 비공식 네트워크 활동을 하면서 여성농민운동을 위한 준비를 했다. 농촌 현장 투신을 결심하고, 결혼 문제를 고심하다가 1979년 나상기와 결혼했다. 1983년부터 농촌탁아운동과 탁아교사 훈련 활동을 전개했으며, 농촌지역 교회 단위를 중심으로 여성농민 교육과 강의를 다녔다. 지역의 집체교육을 다니면서 지역별 대표적인 여성활동가들을 양성했다. 1984년 남편 나상기가 광주로 내려오면서 가족이 모두 이주했고, 이때부터 광주전남지역 여성농민 조직화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매진했다. 마을 부녀회 단위로 여성농민 의식조사를 실시하면서 부녀회 문화활동과 조직사업을 전개하며 조직화를 추진했다. 의료보험투쟁, TV시청료 거부운동, 농촌지역탁아운동 등 주요 현안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연대하여 성과를 만들었다. 지역조직 활동과 함께 전국단위 독자적 여성농민조직 건설을 위한 네트워크 모임에도 참여하면서 꾸준히 자주적 여성농민 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를 했다.
1989년 전국적 비공식 네트워크 조직인 ‘전국여성농민조직활성화를 위한 위원회(조활위)’가 출범하면서 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자주적 여성농민 조직 건설을 반대하는 세력과의 갈등으로 준비위원회가 본격화될 때 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이정옥에게 준비위원장을 넘겼다. 전남지역 여성농민회 건설은 군 단위를 근간으로 조직화되었는데, 해남, 강진, 무안, 승주의 군 조직을 만들어 전남여성농민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군 단위 여성농민회를 조직하면서 학생출신 여성활동가들로부터 의심과 비토를 받기도 했다. 1992년 전남여성농민회 부회장직을 끝으로 생계를 위해 여성농민 조직에서 떠났다. 1980년 말부터 1990년 초까지 광주전남지역 여성농민운동의 교육과 조직화를 위해 매진하면서 여성농민운동의 역량과 대표적인 활동가들을 성장‧발전시켰지만, 육아와 가족들에게 소홀하여 상처를 줬다는 것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광주전남지역 여성농민 조직화, 여성농민운동 내부의 갈등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