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베트남 파병

박정희 정권의 월남 파병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 파병을 했느냐에서부터, 파병으로 인한 경제적, 외교적 효과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에 한국의 전반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국으로부터 쿠데타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61년 11월에 미국 대통령인 케네디의 초청 형식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먼저 파병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 이 자리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에게 월남 파병을 먼저 제안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무튼 박정희는 국가 안보를 미국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국 군대를 제3국인 월남에 파병하여 미국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박정희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자신의 좌익 경력을 희석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의 목적이 있었다. 국군을 파견하여 발생하는 군인들의 봉급은 턱없이 부족한 외화를 마련하는 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결국 한미 양국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협정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63년 9월에 의무부대 요원 130명을 붕따우에 파견한다. 그리고 이듬해 3월에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원 2000명을 사이공에 파견하였으며, 국회에서는 이 해 7월 30일에 파병동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법적 장치를 마련한다.
그 후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64년 10월에 한국과 월남 사이에 군대 파견에 대한 협정이 체결된다. 전세가 불리해진 월남 정부는 한국 정부에 전투부대 파병을 정식으로 요청하게 되고, 한국 국회는 여당 단독으로 전투부대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65년 9월 25일에 첫 전투부대인 맹호부대가 월남으로 떠나고, 10월 9일에 해병 청룡부대, 이듬해 9월 5일에 백마부대가 파견되어 이국땅에서 피를 흘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