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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포그 연기 자욱했던 오월 속으로_ 5.3인천민주항쟁
요약설명 : 시위는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경찰들의 강경 진압에 수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명자 언니도 그날 경찰에 잡혀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말도 마.” 명자 언니는 그날을 생각하며 진저리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좁은 유치장에 사람들을 빽빽이 갇혀놓고 무자비하게 다루었어. 남자들은 몽둥이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여자들은 속옷 차림으로 쪼그려뛰기도 시키면서 자기네들끼리 시시덕거렸지. 게 중에는 나중에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으로 유명한 문귀동이란 자도 있었어.” 그날 이후 기다렸다는 듯 특별 검거령과 함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정보·수사·대공 합동 전담수사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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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통같은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부마민주항쟁
요약설명 : 고교생까지 포함하여 청년, 시민들이 연행되었지만 한번 댕긴 불길이 번지듯 시위대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이미 시위는 학생들 차원에서 벗어나 시민항쟁의 양상으로 변해가는 모습이었다. 10월 17일 날이 밝자 시위는 계속되었다. 분노한 민중들은 파출소, 경찰서는 물론 정권의 외곽 노릇을 했던 KBS와 MBC, 부산일보, 경남도청, 중부세무서 등을 습격하고, 경찰차와 방송국 차를 불태웠다. 거리거리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구호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려 퍼졌고, 애국가가 수도 없이 불렸다. 1972년 유신체제 이후 가장 극렬하고 가장 큰 규모의 항쟁이었다. 유신의 끝자락이었던 1979년은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 독재권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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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기록으로 보는 강원지역 4월혁명
요약설명 : 춘천경찰서를 지나 도청으로 향했다. 3.15부정선거 이후 3월 21일에 계획되었던 춘천지역 고등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정보 누설과 관련자들의 연행으로 좌절된 이후 벌어진 첫 시위였다. 춘천고등학교는 당시 주‧야간 합쳐 1천5백 명 가량 되었는데 이중 1/3이 참여했으며 이는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비상연락망을 통해 가능하였다. 도청에서 홍창섭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청하였고 제비뽑기로 뽑힌 두 명의 학생들이 들어가 대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 요구사항은 ‘학원에 정치적으로 간섭하지 말아라’ ‘수업을 조속하게 빨리 하자’ 이었다. 이 시위에는 춘천여자고등학교, 성수고등학교, 춘천농대 등이 합류하였는데 도지사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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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교진
면담자 : 정호기, 양라윤
일자/장소: 2023.7.7./세종특별자치시 교육청
요약설명 : 24일 공주경찰서로 연행되었고, 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되어 32사단에서 4주간 훈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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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식, 유재향
면담자 : 유수정
일자/장소: 2004.10.26.(1차), 11.22.(2차)/청주도시산업선교회
요약설명 : 복직투쟁, 연행 후 경찰서 구류, 청주시장 불구속 입건, 유재향씨 청소붓 활동전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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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철
면담자 : 차성환
일자/장소: 2017.7.10./부산민주공원 교육실
요약설명 : 이야기, 경찰서에 연행된 경험, 노동자지원집회, 대통령선거 시기의 경험, 6월항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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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자 : 1960.2.28
분류 : 시위 상황
요약설명 : 사복경찰관들을 시내 각 요소에 배치하여 시위 학생들을 발견하는 대로 연행했다. 오후 1시 30분 경부터 연행되기 시작한 학생들은 경찰국에 120여 명, 대구경찰서에 약 50명, 남대구경찰서에 80명(여학생 30명 포함)이었다. 경찰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오후 5시 30분부터 6시 사이에 주모자로 알려진 학생 수명만을 제외하고 모두 학교 당국에 인계, 석방했다. 경북도지사는 학생시위사건 수습은 될 수 있는대로 학원 당국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후 밤 늦은 시각에 도지사 관사 앞에서 연행된 경북사대부고 학생 4명과 시위 주도자로 알려진 경북고 이대우 외 수 명의 학생도 밤 10시 경 훈계·방면하였다.『 대구일보』1960.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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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상업고등학교, 40여 명 시위
일자 : 1960.2.29
분류 : 시위 상황 > 대구
요약설명 : 전날 시위로 경찰에 연행된 경북고와 대구고 학생들의 석방을 호소하기 위한 시위를 협의하였다. 첫째 수업 시간이 끝나면 전원 운동장으로 나와 삼덕로터리 부근에서 집합하기로 결의했으나 교직원과 경찰의 제지로 10시 30분 경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은 40여 명에 불과했다.동아일보는 학교를 나온 학생이 40명(『동아일보』1960. 3. 1 조3면), 대구매일은 20명, 잡지 새벽은 20명 정도로 밝히고 있다(남욱, 「2·28대구학생데모사건의 진상」,『 새벽』1960월 4월호, 98쪽). 이 과정에서 경찰을 피하기 위해 학생들이 담을 넘다가 학교 벽돌담이 무너지기도 하였다. 시위는 교직원과 경찰의 제지로 10분만에 해산되었다.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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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고등학교 학생들, 시위 모의 중 경찰에 연행
일자 : 1960.3.7
분류 : 시위 상황 > 부산
요약설명 : 오후 7시 경 동부산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다음날 새벽 귀가하였다. 경찰은 서울에서 파견된 학생들의 선동으로 부산 지역 일부 학생들이 가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한편 부산 영도에서는 학생 2명이 공명선거호소위원회 명의의 삐라를 인쇄하는 도중 경찰에 발각되어 삐라 300매를 압수당했다. 이에 대해 경남경찰국은 민주당의 조종과 서울 학생시위사건에 자극된 일부학생들이 부산에서도 시위를 모의하는 도중 사전에 탐지되었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학생들이 정치에 가담하여 시위를 모의한 행위에 대해 학교와 학부형들이 특히 유의해야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학생들이 작성한 삐라 내용은 다음과 같다.『동아일보』1960.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