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2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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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가 쓴 글 모음]
등록번호 : 00197149
날짜 : 미상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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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유진오씨의 빈소철거 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
등록번호 : 00093340
날짜 : 1987.09.07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고(故) 유진오씨 빈소철거 사건에 대해 동요하지 말고 정당한 자세를 고수하자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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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유진오씨의 빈소철거 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
등록번호 : 00182459
날짜 : 1987.09.07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
요약설명 : 고 유진오씨의 빈소가 민족 고대에 차려진다는 것을 비교훈적이라 생각하여 사회적...
사진사료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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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국민투표를 하고 있는 유진오 총재 내외의 모습
등록번호 : 00723588
날짜 : 1969.10.17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유진오 신민당 총재 내외는 10월 17일 오전 8시 55분 필동2가투표소에서 투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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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모임을 갖고 회의하는 윤보선, 백낙준, 유진오, 이범석 씨
등록번호 : 00734239
날짜 : 1967.01.26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씨 등 재야지도자들은 첫 4자회담을 열고 민중, 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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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리대사 뉴먼과 자신의 집에서 2시간 20분간의 회담을 한 유진오
등록번호 : 00719913
날짜 : 1967.07.14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민주화운동사 컬렉션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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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시위
요약설명 : ‘한일회담’ 조건으로 총 471건, ‘6·3’ 조건으로 총 219건이 검색되었다. 당시의 주요사료로는 6.3동지회가 생산한 <6.3 포럼 창간호> (등록번호 : 161613) 등으로, 문서사료는 많지 않다. 이에 비해 사진사료는 비교적 풍부하며 주로 경향신문사 생산사료들이다.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굴욕회담으로 규정, 전국적 반대 운동의 시발점이 된 6.3 운동 당시 모습> (등록번호 : 723198), <한일회담 결사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선 서울대학교 학생들> (등록번호 : 742493), <서울 시내에서 열린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연행해가는 경찰들> (등록번호 :742418), <6.3 출옥 학생과의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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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18 고려대생 시위 및 피습사건
요약설명 : 4.18 시위를 기념하여 후일 행해진 각종 행사와 관련된 사료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33주년 4.18자료집인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민중정치 실현을 위한 대장정>(등록번호 : 5456), 고려대총학생회의<‘97 4.18민중해방대장정 토론자료집-불복종의 역사를 오늘에 이어>(등록번호 : 15732), <4.18특집신문-민중과 함께 민족고대는 싸우고 있다> (등록번호 : 117487) 등 고려대학교 학생회가 4.18을 맞아 생산한 문건들이 많다.
사료 콘텐츠 1건
더 보기구술 컬렉션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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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동
면담자 : 이정은, 이주봉
일자/장소: 2010년 7월 8일/서울 구술자의 사무실
요약설명 : 하였다. 유진오 총장이 나와 "지금 밤이 어두워가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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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표
면담자 : 현대사기록연구원(이주실)
일자/장소: 2010년 11월 2일/ 경기도 군포 구술자 자택
요약설명 : 있는데 유진오 총장이 나와서 연설을 했으나 학생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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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남
면담자 : 이주봉
일자/장소: 2010년 7월 16일/국민체육진흥공단 구술자의 사무실
요약설명 : 시위대는 유진오 총장의 회유로 일단 귀교했다. 귀교 시 선두에는 지프차가 있었는데,...
일지사료 29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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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된 연행학생들
일자 : 1960.4.18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시위도중 연행된 학생들은 치안당국과 학교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자 즉시 석방되었다. 국회 앞에서 학생들을 해산하라고 설득하다가 실패한 유진오 총장과 교수들은 이들의 석방을 위해 직접 각 경찰서를 방문하였다. 종로경찰서 58명, 동대문경찰서 16명, 도합 74명이 석방되었다. 이들은 버스로 학교로 옮겨졌는데, 이중 10여 명은 석방즉시 농성이 진행 중인 국회 앞으로 갔다.『고대신보』1960. 5. 3 2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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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설득으로 시위대는 학교로
일자 : 1960.4.18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오후 5시 반 경, 계속 농성 중인 고려대 학생들 앞에 유진오 총장이 다시 등단하자 학생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유 총장은 마이크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58명과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16명이 지금 막 석방됨으로써 오늘 시위의 희생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자 또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계속하여 유 총장은 “해도 기울어지고 있으니 이 이상 농성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성을 상실치 않은 학생들의 시위를 치하하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간단히 말한 후 단에서 내려왔다.『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계속하여 고려대 출신인 민주당 이철승 의원이 올라와 “나는 이철승이다. 가슴 아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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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총장이 직접 나와 시위대 설득
일자 : 1960.4.18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10여 명의 교수들을 실은 고려대 전용버스가 의사당 앞에 나타났다.일부 기록에는 유진오 총장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온 시각이 오후 3시 반으로 되어 있다(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31쪽).학생들의 시위가 장기화할 우려가 있자 당황한 한상봉 고등교육국장이 전화로 유진오 총장을 불러내어 학생들을 해산시켜주도록 요청한 것이었다. 시경은 백차에 마이크를 장치하고 유 총장의 등단을 기다렸다.조화영 편, 79쪽유 총장이 경찰차에 장치된 마이크를 빌려 학생들을 향해서 연설을 시작하려 하자학생들은 “경찰 마이크 쓰지 말라”, “자유당 마이크 집어치워라”고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유 총장은 빌려온 다른 마이크를 통해 학생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