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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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기록으로 보는 충북지역 4월혁명 - 청주
요약설명 : 따라 행진을 했고 청주상고에 이르자 청주상고 학생 600여 명과 부근에 있는 청주여상 학생 100여 명이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곤봉을 휘두르며 강력하게 막는 경찰과 지프차를 향해 투석전을 벌였고 학도호국단가와 전우가를 부르며 행진을 계속했다. 시위대열의 행진에 청주고와 청주여고 학생들도 참여했고, 시민들 역시 골목골목 모여서 박수치며 시위에 합세했다. 3,000명 정도의 시민과 학생이 참여했다. 시위가 본격화되자 소방차, 기마대, 정·사복경찰관이 총동원되어 시위를 제지했고 700~800명의 학생들은 청주역 뒤 우암산으로 쫓겨 갔다. 학생들은 자정이 되도록 우암산 꼭대기에 횃불을 들고 올라가 시위를 계속했다.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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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들꽃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요약설명 : 항쟁을 배후 조종했다는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외국환 관리법 위반에 대해서는 각각 면소 판결됨으로써 25년 만에 완전히 종료되었다. 사료관에는 김대중 관련 사료가 2,500여 건이 수집되어 있는데 이중 200여 건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 사료다. 상고이유서와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의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공판기록>은 이 사건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입장과 피해자 김대중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이다. 한편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작성한 호소문과 송건호씨의 아들 송준용의 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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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을 아시나요? - 4.19 혁명
요약설명 : 고향인 남원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마산고등학교에 다니는 형을 따라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친척집에 머물던 중이었다. 어머니의 애끓는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김주열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야당 조사단에게 호소하여 시청 뒤 물탱크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애끓는 자식 찾기 사연은 당시 15만 마산 시민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그런 날들이 20여일 지나가고, 김주열의 어머니도 다시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간 지 사흘 째 되던 날.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 위에 시체...
구술 컬렉션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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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면담자 : 김용재, 이영조
일자/장소: 2010년 8월 24일/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 사무
요약설명 : 뒤 청주상고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18일에 참여한 학교는 청주공고와 청주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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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섭
면담자 : 김용재, 이영조
일자/장소: 2010년 7월 27일/서울 구술자의 개인 사무실
요약설명 : 청주공고, 청주상고 전교생과 청주고, 청주여고 일부학생들 3,000여 명 정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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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기
면담자 : 김용재, 이영조
일자/장소: 2010년 7월 27일/청주 서원대학교 교정
요약설명 : 청주공고의 오성섭, 청주상고의 심건호, 청주농고의 강병웅 등의 청주지역 학생...
일지사료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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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시위 전개
일자 : 1960.4.18
분류 : 시위 상황 > 청주
요약설명 : 삼삼오오 흩어졌던 학생들은 재차 청주상고 교정에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오후 2시 20분 경 600여 명이 집결하자 2차 시위에 들어갔다. 청주상고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는 학도호국단가를 제창하면서 시내 번화가를 관통하여 청주역전으로 향하였다. “경찰의 학원간섭을 물리치자”, “우리들의 동료를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부르며 나아가다 중앙시장 앞 시영 목욕탕 앞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으샤으샤”하며 한국은행 청주지점 앞을 향해 시위를 강행하다가 충북여객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차 3대, 트럭 1대로 완강히 제지하는 경찰과 대치하였다. 여기서 10여 명이 연행되자 일대는 시내 남문로 방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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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고등학생들 시위, 저지하는 경찰에 투석 항거
일자 : 1960.4.18
분류 : 시위 상황 > 청주
요약설명 : 11시 50분 경 청주공고 학생 약 600여 명이 먼저 내덕동 방면으로 행진하여 청주상고로 돌입하였다. 청주상고에서는 학생 간부가 선언문을 낭독한 후 학생 600여 명이 부근에 있는 청주여상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경찰과 교사들의 완강한 제지를 무릅쓰고 청주공고 학생들의 시위에 가세하였다. 이들은 경찰 지프차와 기마대에 투석하면서 “정부는 마산학생사건에 책임져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치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학도호국단가와 전우가를 부르며 행진을 계속하던 시위대는 청주고 앞에서 청주고 학생 약 1천 명과 다시 합세하여 도청 앞으로 몰려들었다. 일부 군중들은 시위대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중도일보』1960. 4. 2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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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 16개 도시로 확대 30여 학교, 데모 나흘째 계속
일자 : 1964.3.2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명이 굴욕외교반대 시위를 했다. ▶청주 27일 상오 10시 청주대 300여 명과 교육대 250명, 청주고 1,400명, 청주상고 1,600명, 청주농고 90명 등 5,000여 학생이 “친일외교자 김종필을 즉각 소환하라”, “곤봉은 진정한 민중의 지팡이가 되라” 등 구호를 외치며 11시 반 도청광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목포 27일 상오 11시 반에 문태고교생 600명은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곳 고교 대표들은 공고에 모여 학생들이 취할 태도에 관해 회의를 했다. 목포고, 목포공고, 목포상고, 목포여고, 실업고, 문태고교 학생 약 5,000명은 하오 1시 역전 광장에 모여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국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보도 양보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