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6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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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거부에 들어가며
등록번호 : 00879978
날짜 : 1990.07.13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요약설명 : 방송관계법 개악작태에 철퇴를 가하기 위해 7월 14일 5시를 기해 제작거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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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제작거부를 계속하고 있는가-제작거부 한달째를 맞으며
등록번호 : 00885721
날짜 : 1975.04.12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요약설명 : 오늘까지 제작거부 투쟁을 진행하고 있음을 알리고, 하루 빨리 권력의 광고탄압 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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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制作拒否를 계속하고 있는가-제작거부 한달째를 맞으며
등록번호 : 00040991
날짜 : 1975.00.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이정순
요약설명 : 부당 해임된 기자와 사원은 40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의 해임을 즉각 철회할 것 등을...
사진사료 1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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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관계법 개정안 국회문공위 변칙통과에 항의하여 MBC 노조의 제작거부 찬반투표 집계 결과...
등록번호 : 00712127
날짜 : 1990.07.12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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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관계법 개정안 통과 이후 제작 거부를 하고 있는 MBC 노조원들 1
등록번호 : 00712134
날짜 : 1990.07.00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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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원들의 전면 제작거부로 간부들만 남아 일하고 있는 MBC 보도국
등록번호 : 00712139
날짜 : 1990.07.13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영상사료 1건
더 보기사료 콘텐츠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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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들의 목소리, 동아일보 백지광고
요약설명 : 기자들이 제작거부 농성에 돌입하기 직전까지의 백지광고 묶음철이다. 정확한 수집이다. 1975년 3월 17일, 자유언론을 위해 노력하던 기자 134명이 무더기로 해직되었다. 광고탄압은 12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동아일보의 오랜 고객이던 광고주들이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광고 계약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백지광고를 싣게 된 12월 26일에는 평상시의 절반도 안 되는 광고만이 들어 왔다. 광고탄압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나자 평소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텅 빈 광고란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각계각층에서 성명서, 결의문이 쏟아져 나왔다. 일반시민과 독자들 사이에서도 ‘동아돕기운동’이 번져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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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 - 펜의 힘을 보여준 언론자유수호투쟁
요약설명 : 우리는 지금부터 아무런 기사도 쓰지 않을 것이오.” 신문 제작 거부라는 초강수를 두며 맞선 기자들은 결국 경영진을 굴복시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기사화하는 데 성공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거사는 강력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밤 9시 20분경, 조선일보사 기자 150여 명이 편집국에 모여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들은 선언문 채택과 아울러 “1) 자유언론을 수호하기 위해 어떠한 부당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배제하고, 2) 언론인들이 보도 활동과 관련 부당하게 연행 구금당할 경우 귀사할 때까지 철야농성을 하며, 3) 학생, 종교인 등 각계의 정당한 의사 표시는 반드시 게재한다.”는 등의 3개 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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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시청료거부운동-신군부에 도전한 국민 저항운동
요약설명 : 14일, 운동본부는 KBS시청료거부운동을 효과적으로 벌이기 위해 스티커 5만 장을 제작해 배포했다. 스터커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KBS-TV를 보지 않습니다.” 운동본부는 스티커 외에도 홍보 유인물 1만 부를 따로 제작해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홍보 유인물에는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KBS-TV가 1985년의 2·12 국회의원 선거 보도의 경우에서처럼 여당인 민정당의 홍보 · 선전매체로 전락하여 대중의 정치의식 잠재우기로 일관하고 있다.” 시청료 거부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운동본부의 자원봉사자들은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스티커와 홍보 유인물을 배포했고,...
구술 컬렉션 7건
더 보기일지사료 1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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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전야,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 준비 절정
일자 : 1960.3.14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부정선거의 진행과 정부·여당
요약설명 : 투표소가 만들어졌는데 민주당 선거위원이 시찰을 요구했으나 군당국이 거부하였다. 또한 무주에서는 민주당이 내통식 투표소를 비난하며 시정을 요구했으나 자유당이 거부해 시정이 불가능하였다. (다) 경상북도 학생시위의 시발점인 야당도시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에서도 자유당의 공개투표가 계획대로 추진되었다. 약 170만의 유권자를 가진 대구에서 민주당은 약 30%의 참관인만이 신고를 마치면서 극도의 사기 저하 상태에 빠졌다. 도시인 대구지역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민주당은 선산군, 봉화군에서단 한명의 참관인도 내지 못하였으며 경상북도 전체의 참관인 신고는 약 30%에 불과했다. 지방 민주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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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판자본 몰수하여 실업자 구제하라” 서울대생 200여 명, 한일굴욕외교 반대와 학원사찰 ...
일자 : 1964.4.1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간 민족문화재 반환도 사실상 거부하고 있으며, 문화협력 증여 운운하는 파렴치를 범하여 저들의 강제노역에 징용당했던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를 보장할 것을 거부하고, 반세기의 살인적 폭압과 수탈의 대가는 금전으로 계산할 수도 없지만, 국제법적인 당연한 권리인 일본의 국공채, 보험, 사채, 주식, 저금, 미수 노임, 급여 등에 대한 “청구권조차 경제협력 공여의 부수적 결과로 해소된다”는 식의 파렴치 논법을 고집하고 정부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청구권,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문화재 반환 등의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 불법강점의 범죄적 결과임을 확인하고, 그 역사적 죄악에 대한 사죄의 구체적 표현이 되어야 하며, 이것은 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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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자들, 언론자유수호 선언
일자 : 1971.4.15
분류 : 분류없음 > 재야·야당·지식인·종교인
요약설명 : 보도여부에까지 외부의 손길이 미쳤고, 이른바 정보기관원의 ‘상주(常駐)’가 빚어내는 모든 불합리한 사태는 일선 언론인인 우리들에게 치욕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이에 우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가 어떤 구실로도 침해되어서는 안되며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회복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기관원의 상주나 출입은 허용될 수 없으며 신문 및 방송의 제작, 판매의 전 과정은 언론인의 양식에 따라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오늘의 언론위기의 책임을 전적으로 외부로만 전가하려 하지 않으며 권리 위에 잠잔 스스로의 게으름을 반성하려 한다. 우리는 기자적 양심에 따라 진실을 진실대로 자유롭게 보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