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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주화항쟁의 발발

부마항쟁이 구체제의 붕괴에 기인하여 10.26을 잉태한 것과 같이 광주 5.18은 10.26 사건 이후 신군부의 12.12 쿠데타를 거쳐 권력 장악 과정인 5.17 계엄을 확대한 것에 분연히 맞서 항거한 민중항쟁이다. 비상계엄령은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하는 것이다. 10.26 사건 이후 북한으로부터 침공이나 내부로부터의 국가안보의 위협이 전혀 없었고 더구나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이 계속 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군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고자 비상계엄을 해체하지 않았다. 신군부는 서울의 봄 시기 정치적 상황을 안개정국으로 유도한 다음, 전두환이 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함으로써 강경군부의 정권장악 기도를 가시화 하고 있었다. 5월17일 비상계엄확대 조치와 함께 18일 새벽2시경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사실상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국회가 계엄해제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계엄령 선포 후 세상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지만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신군부는 특전사 소속 7여단과 11여단 병력을 광주로 내려 보냈다. 이른바 ‘충정훈련’으로 무장한 병력이었다. 5월17일 오후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선 공수부대 1천여명이 작전개시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사이에서 최초 광주항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등교를 원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평화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계엄해제와 휴교령 철회를 외치는 학생들에게 공수대원들이 파고 들면서 살상용 곤봉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진압을 시작했다. 피의 항쟁이 시작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