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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연대사태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등장하면서 학생운동은 더욱 위축됐다. 1993년 4월 25-27일 전북대에서 183개 대학 5천여명의 대의원이 모인 가운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후신으로 새로이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창립됐다. 한총련은 전대협이 각 대학 총학생회의 조직체인데 비해 각 대학 단과대까지 총망라한 조직이었다. 한총련의 조직 결합 수준은 전대협보다 높았으나 전체 역량은 전대협과는 비교가 안 되게 위축됐다.
한총련이 위축된 데는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도 큰 역할을 했다. 사회주의가 실패함으로써 변혁운동의 이념적 대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6?29 이후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중간층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은 반독재 민주라는 전통적인 학생운동의 목표에 혼선을 가져왔다. 노동자와의 연대를 중시하는 PD진영에서 공공연하게 NL 주도의 한총련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커져갔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사회정의와 같은 문제보다는 일신상의 문제에 주력하는 개인주의적인 풍조가 만연했다. 한총련은 이러한 내부적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조국통일투쟁 일변도의 관행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학생들은 점차 한총련을 떠나갔다.
김영삼 정권은 김일성 조문 파동 이후 대북정책에서 강경보수 일변도로 나아갔다. 김영삼 정권은 한총련의 범민족대회와 여타 대북 접촉활동을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김영삼 정권의 탄압은 1996년 8월 12-20일 연세대에서 열린 제7차 범민족대회와 제6차 청년학생통일축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사상 최대 한총련 대학생들의 시위 및 농성으로 빚어진 연세대 사태는 20일 새벽 경찰이 연세대 구내 종합관에 대한 진압작전을 펼쳐 학생들을 연행함으로써 9일만에 종결됐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경찰의 기습적인 ‘독수리작전’으로 9일간의 농성 대치극이 막을 내린 연세대는 폐허 그 자체였다. 건물 주변에는 불탄 집기와 시위용품들이 어지럽게 나뒹굴어 아수라장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6천여명의 경찰 병력과 헬기까지 동원해 연세대에 모인 학생 5,713명을 연행했다. 연세대 사태와 관련해 구속된 사람만 465명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 정권은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학생들의 한총련 탈퇴를 적극 유도했다. 운동 전반의 퇴조와 정권의 물리적 강요에 의해 1997년 3월 대구대, 경산대를 필두로 많은 학교가 한총련에서 탈퇴했다. 여기에 1998년 7월 대법원에서 한총련이 이적단체라는 확정 판결이 남으로써 한총련의 활동은 더욱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