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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8.15해방과 독립운동 인사

일제로부터 우리나라가 해방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가 원인이었지만, 우리 민족의 끊임없는 항일 독립운동은 그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국내에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많은 지도자들의 피와 땀이 쌓여 민족 정기를 이어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가장 먼저 독립국가의 재건에 나선 이는 몽양 여운형이다. 해방 전부터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지하운동을 해온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의 엔도 정무총감을 만나 정치범 즉각석방, 식량 확보, 치안유지 등을 요구하고 건국에 착수한다.
건국동맹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개편되어 해방과 더불어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고 건국활동에 착수하는데, 여기에는 안재홍을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익 지도자인 송진우의 참여도 권유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러나 9월 8일 인천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미군은 건준이 추진중인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우익의 조병옥, 김성수, 송진우 등이 결성한 한민당을 지지하면서 인공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10월 16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인사들 중 처음으로 이승만이 귀국하였다. 그는 미군정의 도움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헤게모니 장악에 나선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미군정의 반대로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게 되는데, 그것도 11월 23일에야 뒤늦게 합류한다. 정세 파악에 어두운 이들은 좌우 합작에 의한 역량의 결집에 소홀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임정의 법통을 중시하여 대중적 지지가 높은 인공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 인사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면서 건국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독립운동가들도 많았다. 이봉창, 윤봉길, 안중근 등 일제에 직접 맞서다 그들에 의해 처형당한 이들, 해외에서 숨진 안창호 등이 그들이었다.
서재필은 미군정의 초청으로 47년에 귀국하였지만, 이승만 등의 정권욕에 실망하여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여생을 마친다.
이렇게 수많은 독립운동 인사들이 해방을 맞아 건국을 위해 움직이지만, 각자의 이해관계가 어긋나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조국의 분단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