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컬렉션
청산리 대첩 이범석 장군
이범석 장군(1900〜1972)은 1915년에 중국의 금릉대학에 다니다 일시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할 청년학생을 물색하던 여운형의 눈에 띄어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윈난육군강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기병장교가 되었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간다.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들로부터, 만주에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라는 권유를 받고 다시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다. 그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교관, 사단연성소 교수부장 등을 지냈다.
그러던 중 일본군은 한국 독립군을 토벌간도지역에서 군사작전을 감행한다. 그리하여 1920년에 청산리전투가 벌어지는데, 이때 이범석 장군은 김좌진 장군을 도와 제2대대 지휘관으로 활약하여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청산리 대첩 후 이범석 장군의 모습에서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장군은 생전에 『우둥불』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1964년에 방한한 대만의 장군 비서장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범석 장군의 모습이 보인다.
이범석 장군은 1972년 5월 11일 별세했다. 영결식은 1972년 5월 17일 오전 10시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2만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간다.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들로부터, 만주에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라는 권유를 받고 다시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다. 그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교관, 사단연성소 교수부장 등을 지냈다.
그러던 중 일본군은 한국 독립군을 토벌간도지역에서 군사작전을 감행한다. 그리하여 1920년에 청산리전투가 벌어지는데, 이때 이범석 장군은 김좌진 장군을 도와 제2대대 지휘관으로 활약하여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청산리 대첩 후 이범석 장군의 모습에서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장군은 생전에 『우둥불』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1964년에 방한한 대만의 장군 비서장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범석 장군의 모습이 보인다.
이범석 장군은 1972년 5월 11일 별세했다. 영결식은 1972년 5월 17일 오전 10시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2만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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