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컬렉션
조선어학회 사건 국어학자 이희승 모습
일제 말기에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민족 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창씨개명은 물론이며, 언어도 일본말만을 사용하게 하고, 학교에서는 한글교육을 폐지하고 모든 교육을 일본어로 하도록 하였다.
반면 일본 침략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900년 전후부터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한글에 대한 연구가 강화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1년 12월에는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어 국어와 한글연구를 더욱 강화해나가는 한편,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어 사전편찬을 위한 제반 규칙을 연구 정리하였다.
일제는 1941년에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拘禁令)’을 공표하여 민족운동이나 민족계몽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영옥이라는 여학생이 기차 안에서 한국말을 하다가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에게 붙들린 사건이 발단이 되어,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조선어학회가 검거 열풍에 몰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어학회 관련 학자들이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희승 선생을 비롯하여 이극로·이윤재·최현배 선생 등 16명은 기소 처분되었고, 12명은 기소 유예되었다.
사진은 생전의 이희승 선생의 모습이다.
반면 일본 침략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900년 전후부터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한글에 대한 연구가 강화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1년 12월에는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어 국어와 한글연구를 더욱 강화해나가는 한편,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어 사전편찬을 위한 제반 규칙을 연구 정리하였다.
일제는 1941년에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拘禁令)’을 공표하여 민족운동이나 민족계몽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영옥이라는 여학생이 기차 안에서 한국말을 하다가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에게 붙들린 사건이 발단이 되어,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조선어학회가 검거 열풍에 몰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어학회 관련 학자들이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희승 선생을 비롯하여 이극로·이윤재·최현배 선생 등 16명은 기소 처분되었고, 12명은 기소 유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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