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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의회와 정당, 정치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해방 후 해외 독립운동 인사로는 가장 먼저 국내에 들어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독립촉성중앙회를 조직하여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미 국내에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송진우, 김성수 등 부르주아, 지주 세력과 친일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한민당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은 한민당에 철저히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5.10선거에서 이승만과 한민당계열 인사들이 대거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승만의 주장에 의해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뒤 7월 17일에 제헌헌법을 공포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다.
그리고 6.25 전쟁기간 중에 이승만의 뜻에 따라 자유당을 결성하고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키며 장기집권을 위한 시도에 착수한다. 그리고 58년 민의원 선거를 통해 3선개헌을 시도하지만 개헌정족수를 채우지 못하자 무소속의원들을 매수하여 개헌안을 통과시키려다 부결되자 사사오입 논리를 주장하며 통과를 강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정을 저지르다 국민의 저하에 부딪혀 4.19 혁명이 발발하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만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이런 행보와는 달리 야당 계열의 정당들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우선 한민당은 5.10선거 이후 제헌국회 출범 과정에서 이승만과 사이가 벌어져 여러 차례 분화와 변신을 거듭하여 민국당, 민주당, 신민당, 민중당, 신한당 등으로 이어지며 한국 야당의 모태가 된다.
그리고 진보당의 조봉암은 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세 도중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자 야당의 대표주자로 이승만과 대결하여 무시할 수 없는 득표를 하였지만, 이에 이승만의 견제를 받아 결국 간첩 혐의를 받고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결국 온갖 부정과 부패를 일삼던 이승만 정권이 민중혁명에 의해 붕괴된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지만 또 다시 박정희 군부에 의해 정권을 탈취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