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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쿠데타와 박정희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는 장교와 사병 3700여 명이 김포가도를 통해 용산을 향해 진격했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이들은 육군본부와 치안국, 그리고 방송국 등 국가의 중추기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벽 5시경 중앙방송국에서 쿠데타 성공을 알리는 장도영 중장의 비상계엄 선포 소식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 중장은 쿠데타에 참여하여 장면 총리를 기만하였고,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하여 나타나지 않았으며, 윤보선을 비롯한 다른 정파들과 한국에 대해 결정적 영향력을 가진 미국은 쿠데타에 대해 수수방관함으로써 쿠데타는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쿠데타 발생 이틀 후인 5월 18일에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장도영이 의장을 맡고 대부분의 군 요직 인사들이 포함된 30명의 혁명위원과 2명의 고문을 두었다. 혁명위원회는 다음날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뒤 장도영을 내각수반 겸 국방장관에 임명하는 등 군인들로 내각을 구성했고, 시도지사를 비롯한 읍면장까지 모든 행정기관을 군인들이 장악했다.
군부는 ‘6대 혁명공약’을 발표하여 첫째로 반공을 내세우고 경제발전이라는 명분을 포함시켜 극우정치를 할 것임을 선포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6월 6일에 국가비상조치법을 공포하여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장악한 최고통치기관으로서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의 해산을 명했고, 헌법 기능을 중지시켰다. 그와 동시에 장도영은 반혁명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송요찬을 내각수반에 임명하였으며,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국민들을 옥죄는 정보정치를 단행한다.
그리고 혁명공약에서 정부를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이 군복을 벗으면서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3공화국이 출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