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12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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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특히, 서울대 이념서클의 형성 및 계승과정과 인맥]
등록번호 : 00523422
날짜 : 198*.00.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이상철
요약설명 : 서울대 이념서클의 형성 및 계승과정, 학내활동 분석, 학생측면의 주요내용 분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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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학생운동의 최근 논쟁 개관
등록번호 : 00083565
날짜 : 미상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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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학생운동의 최근 논쟁 개관
등록번호 : 00106743
날짜 : 1986.05.07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사진사료 1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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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에서 해방춤을 추는 서울대 학생들
등록번호 : 00957147
날짜 : 1987.05.00
구분 : 문서류 > 필름
기증자 : 정태원
요약설명 : 서울대에서 제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를 개최하던 중 학생들이 해방춤을 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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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정착과 민족화해를 위한 서울대 학생운동본부 출범을 알리는 플래카드
등록번호 : 00742869
날짜 : 1994.07.28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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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 통일 시대 맞이 학생운동 본부" 발족식이 열리는 모습
등록번호 : 00740738
날짜 : 1994.08.30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민주화운동사 컬렉션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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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ㆍ2시위~전국 각 대학 동맹휴학 사건
요약설명 :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시위사건부터 각 대학의 시위가 마무리된 12월까지 각 대학의 성명서(등록번호 : 100826외), 선언문(등록번호 : 126060외) 등과 구속학생대책위원회(등록번호 : 480391), 기독학생회 등의 성명서, 사건경위서(등록번호 : 89691외) 등의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특히 유신체제에 첫 반기를 든 사건이자 각 대학의 연이은 시위와 동맹휴학 사건의 시발점이 된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의 <선언문[정보파쇼통치 중지, 자유민주체제 확립, 국민의 생존권 보장, 김대중 사건의 진상 규명, 정치인과 언론인의 각성]>(등록번호 : 113729)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서울대 10.2 데모 등을 영역하여 외국에 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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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하의 통일운동
요약설명 : : 476285)을 비롯하여, 서울대학교민족통일연맹중앙위원회가 생산한 규약초안(등록번호 : 531953)과 후원의뢰서(등록번호 : 531663), 결성준비금 및 사업경비명세서 등의 희귀사료(등록번호 : 531998)와,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명의의 결의문(등록번호 : 430049)과 성명서(등록번호 : 430084),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공개장>(등록번호 : 430117>, <남북학생회담 및 통일축제 개최에 대한 원칙 및 우리의 요구>(등록번호 : 531896), <남북학생통일축제 및 회담개최에 관한 원칙 및 요구>(등록번호 : 430109)와 같은 문건,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위원회의 호소문(등록번호 : 430086>과 한미경제협정반대 시위...
사료 콘텐츠 3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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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_ 이태영
요약설명 :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던 남편 정일형은 해방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 날 태영에게 말했다. “당신, 법을 공부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소. 지금이라도 해보지 그러오.” 당시 태영은 서른다섯도 넘은 나이였다. 게다가 아이가 넷이었다. “네? 하지만 나이가......” “배움에 나이가 어딨겠소?” “그렇긴 하지만 아이들은 어쩌구요?” “이제부터 애들은 내가 보겠소.” 태영은 남편의 응원에 힘입어 194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에 입학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리고 1952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사법고시 합격자가 되었고, 판사 임용에 실패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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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성사를 풍미한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
요약설명 : 몰두했다. 이러한 집안의 영향으로 박현채는 어릴 적부터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운동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1946년, 수창국민학교 6학년 때 독서회에 가입한 박현채는 최충근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읽는 등 또래에 비해 수준 높은 독서열을 보였고, 학생자치위원장을 맡아 학교 유리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할 만큼 리더십도 뛰어났다. 이듬해 광주 서중에 합격한 그는 독자적으로 서클을 만들어 활동했고 민애청 학년위원(1학년 조직책)에 선임돼 시위 및 삐라 살포와 횃불투쟁 등을 이끌어 나갔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열일곱 살의 박현채는 빨치산으로 입산해 광주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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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S로 세상을 지배한 요지경 5공화국
요약설명 : 5월 27일, 서울대학교 도서관 광장에서는 5.18 1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침묵시위가 진행되던 오후 3시경, 도서관 6층 옥상에서 경제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 뒤 스스로 옥상에서 몸을 던져 사망했다. “이럴 수가! 이따위 쓰레기 기사로 김태훈 열사를 두 번 죽게 하다니!” 다음날 이른 아침, 인사동의 한 조그마한 식당에서 모처럼 친구 J를 만난 P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서울대 학생의 죽음을 단순한 투신자살로 처리한 1단 기사를 발견하고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8일자 주요 신문 사회면에는 '국풍81 화려한 개막'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농가로 내려와 꿀통을 훔쳐...
구술 컬렉션 4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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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면담자 : 박성득, 이병호
일자/장소: 2022.6.28. / 민주언론시민연합
요약설명 :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 전달되었는지 증언 서울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제적 후 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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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환
면담자 : 배병욱
일자/장소: 2019. 9. 6/서울시 종로구 구술자 사무실
요약설명 : 1977~1979년의 서울대 유신반대 시위, 부마항쟁과 10.26사건, ‘서울의 봄’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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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동
면담자 : 신동호
일자/장소: 2018. 8. 14/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요약설명 : 서울대 사회과학연구회 활동, 연합언더조직 일원 참가, 학생회 부활 작업과 총학생회...
일지사료 18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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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대학생학술연구회, 이승만·이기붕 지지 호소문 발표
일자 : 1960.3.10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사회·문화
요약설명 : 이기붕을 선출할 것을 호소하고 학생들의 시위와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산하 학생특별조직위원회를 비난하는 호소문을 신문지상에 광고하였다.전국대학생학술연구회가 발표한 호소문 〈전국 청년학도에게 고한다〉새 세대의 주인공이 될 청년학도여! 역사는 우리들 젊은 청년학도의 사명이 무엇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오랜 옛날에서 찾지 않고 먼 곳에서 구하지 않더라도 청년과 학도가 그 얼마나 민족정기의 상징이요 힘인 것을 알고 있다. 광주학생운동이 민족의 정기를 드높였다면 3·1운동의 횃불을 든 2·28선언의 힘은 그 어떠하였던가! 민족의 힘이요 국가의 간성(干城)인 청년학도야말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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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앞 바리케이드 뚫자 무장경관 발포, 사상자만 수 십 명
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행위의 발사를 감행하였다”고 하였다(조화영 편, 93쪽).『동아일보』는 당시 “실탄 사격으로 사망이 확인된 학생은 손중근(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과 성명이 미확인된 또 다른 한 명, 적십자 병원으로 후송된 5-6명을 합해 도합 20여 명에 달하였다”고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동국대학생 노희두도 이때 경무대 앞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동대시보』1960. 4. 30 1면). 이 시위로 희생당한 서울대생은 사망 7명, 총상 7명이었다(대학신문』1960. 5. 2 1면). 이중에는 서울대 미대 재학 중이던 여학생 고순자도 포함되어 있다. 서울대생들은 오후 5시 반 경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다(『대학신문』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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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동국대학교 학생들 선두로 경무대 향해 전진
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입은 학생이 “홍익대 학생이라고 함”이라 하고, 학생들의 부축을 받고 서울대학 병원으로 운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에는 동국대생 1명이 부상을 입었고, 근처 이태리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들이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부상자가 발생하자 흥분한 시위대는 “죽여라!”, “데모대를 살인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경찰대를 향해 돌을 던지며 맞섰지만 경찰의 첫번째 바리케이드에 막혀 그대로 주저앉았다.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85쪽. 마침 중앙청 앞에서 해무청으로 뚫린 길에는 상하수도공사를 하느라고 도로주변에 돌이 많았다 한다(이순권,513쪽). 경찰과 20미터의 거리를 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