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해방선언'에 대한 통합 검색 결과 : 전체 22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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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사료 16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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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선언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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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099130
날짜 : 1986.04.17
구분 : 문서류 > 정간물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양키놈들에 짓밟힌 여교사 음독자살-팀스피리트도발훈련에 동원된 양키깡패들에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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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선언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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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859279
날짜 : 1986.05.13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김창희
요약설명 : 광주항쟁 계승하여 친미독재 타도하자! 파쇼의 아성에 마지막 철퇴를 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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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선언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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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68227
날짜 : 1986.03.20
구분 : 문서류 > 정간물
기증자 : 김영춘
요약설명 : 해방선언사의 간행물로 내용은 다음과 같음 사설 반미자주화와 반파쇼민주화투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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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료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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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사료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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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컬렉션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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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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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선언>(사료번호 : 100743)을 볼 수 있으며, 이와 함께 각종 성명서의 주요 주장으로 나오고 있다. 5·3인천항쟁과 관련한 <가자! 일천만 노동자의 벼락치는 함성으로 천지를 뒤덮는 노동해방의 대열로!-삼반정권타도 및 삼민헌법쟁취실천대회>(사료번호 : 86888), <경인지역 50만 노동형제에게>(사료번호 : 413194), <광주학살 오적처단 투쟁선언문>(사료번호 : 304055) 등은 반독재 민주화, 삼민헌법쟁취, 생활임금제 쟁취 등을 주장하며 투쟁성을 드러냈다. 5·3인천항쟁 이후 서노련에 대한 탄압으로 구속된 활동가들에게 행해진 가혹한 고문은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회자될 정도였다. 이와 관련하여 <서노련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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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헌의회그룹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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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반제반군부파쇼 민중해방투쟁이여, 승리하라!!!> (등록번호 : 221358), 서울대학교민족민주선언사의 <민족민주선언 호외> (등록번호 : 312211), 제헌의회소집을위한노동자투쟁위원회의 <기만적 개헌안의 정체를 폭로한다-제헌의회 소집하여 민주주의 민중공화국 쟁취하자>(등록번호 :352874 ), 전국반제반팟쇼민족민주학생연맹 경인지역평의회의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전민학련 백만학도 투쟁선언문> (등록번호 : 440094) 등이 있다. 특이한 것으로는 생산자 미상의 문건 <최민,김철수,유강근,이선희,한승권,김성식,윤성구,민병두,김찬,강석령,김현호,이호균,김옥수,차호정,하윤숙 의식화과정> (등록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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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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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자백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이 되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제2차 시국선언-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즈음하여>(등록번호 : 448507)와 <사회정의 실천 선언>(등록번호 : 113734)은 “사회 구조의 모순과 체제의 탄압에 억눌린 자유와 해방과 진실을” 알리고 정치 권력의 비대와 남용을 통제하고 이를 방지하려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여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집권자와 국민의 상호 의무와 권리를 다시 한 번 각성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확신한다”고 선언하며 민중지향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함께 <民主 民生을 위한 福音運動을 宣布한다>(등록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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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콘텐츠 1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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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마, 여기가 어딘 줄 알아?"_ 무법자의 폭력이 춤추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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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벗어났던 해방정국부터 시작되었다. 해방이 되자 이승만 정권은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을 딛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친일 경찰과 친일 헌병대 출신으로 구성된 이른바 ‘특무부대’를 만들었다. 방첩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이승만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사찰하고 탄압하기 위한 일종의 친위부대였던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친일 행각으로 해방 조국의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던 자들에게 하늘에서 내린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잡아 고문하던 고등 경찰과 헌병대 출신들이 일약 반공을 표방한 이승만 정권의 애국자로 둔갑했다. 일제 강점기 헌병 출신으로 악랄하기로 소문났던 김창룡이 특무부대장이 되었다. 그는 친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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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_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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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전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민주구국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하고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유난히 눈에 띄는 한 분이 있었다. 하얀 수염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훤칠한 이마의 노인. 바로 함석헌 선생이었다. “피고들은 3·1절 기념미사가 거행된 명동성당에서 민주회복이라는 명목 아래, 소위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여 청중을 선동하여 시위를 촉발시킴으로써 민중 봉기를 확산하고, 나아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이를 이용하여 현 정부를 전복, 정권을 탈취할 것을 획책하였다.” 판에 박힌 검사의 논고와 또한 판에 박힌 판사의 결심. 팔순을 바라보는 사상가이자 ‘겨레의 할아버지’ 함석헌은 다른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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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농민회총연맹_ 개발독재의 희생양에서 농민운동의 구심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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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창립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이제 농민조직은 하나이다. 전국의 모든 군 농민조직이 전국농민회총연맹의 깃발로 강고하게 결합한 것이다.”라는 창립 선언문에 나와 있듯이 전국 군 단위 74개 농민회로 구성된 당당한 전국 조직, 7백만 농민을 대표하는 거대 단일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경선으로 치른 이날의 총회에서 의장에 권종대, 사무처장에 강기종이 선출되었다. 전농은 1990년대 들어와 우루과이라운드반대투쟁을 벌였고, 2000년대 들어와 수입쌀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전국 공무원 노동조합, 현대 중공업 노조 등과 함께 한미FTA반대운동을 벌였왔다. 이후, 전농은 민주 세력과의 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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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아카이브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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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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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자 : 정호기, 양라윤
일자/장소: 2023.7.21./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사무실
요약설명 : 제2차 민주구국선언 - 5‧18민주화운동 국면에 수감된 남동생, 1979년 8월 15일 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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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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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자 : 이광희
일자/장소: 2018.6.18.~7.27./구술자 자택
요약설명 : 해방 직후의 사회상, 어려운 가정형편과 좌절된 중학교 진학, 6.25전쟁 전후 독학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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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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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자 : 김봉국, 이연숙
일자/장소: 2017.7.31./광양 구술자 자택
요약설명 : 입문하여 해방신학을 접함, 가톨릭이 민주화운동에 있어 갖는 의미, 광양으로 이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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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사료 3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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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농민회, 이승만·이기붕 지지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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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0.2.11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사회·문화
요약설명 : 이기붕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대한농민회 중앙본부 선언문우리 대한농민회는 우리의 총재 이승만 박사를 제4대 대통령으로, 부총재 이기붕 선생을 제5대 부통령으로 당선 추진을 정함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이 엄숙히 선언한다.선 언一. 우리의 조직 통일과 민주 발전을 위하여 국제적인 우애의 정을 우리에게 집결시키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국제적인 연관성을 떠나서 조국의 통일과 민주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오늘날 지구의 거리는 단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이념의 합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이 빛을 거운 지역’과‘신의 은총이 충만한 지역’의 거리는 점차로 멀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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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대학생학술연구회, 이승만·이기붕 지지 호소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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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0.3.10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사회·문화
요약설명 : 2·28선언의 힘은 그 어떠하였던가! 민족의 힘이요 국가의 간성(干城)인 청년학도야말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과감 용맹으로 한 몸의 고통과 박해를 물리치고 오직 구국일념의 정신 밑에 안일과 평안을 버리면서 민족의 얼을 되살렸고 조국의 위기를 구출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한 핏줄 한겨레 피의 진함이 이보다 더한 민족을 보지 못하였고 절개와 양심이 이보다 곧고 맑은 민족을 보지 못하였더니 아! 원통하다 왜정 36년간에 민족을 팔고 조국을 팔아 한 몸의 부귀와 영화를 누릴대로 누린 자 그 얼마였드냐! 다행히 순국선열의 뿌린 피가 헛되지 않고 천운을 가호로 철의 기반에서 풀려 해방조국의 날을 맞았거니 오! 분통의 일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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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대, 동국대학교 학생들 선두로 경무대 향해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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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1916년부터 건립을 시작해 1926년 완공한 조선총독부 청사로 해방 이후에도 정부청사로 사용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광화문을 소격동을 바라보는 궁의 동쪽으로 옮기고, 그자리에 중앙청을 세워 경복궁을 완전히 가렸다. 해방 후에 미군이 이 건물을 군정청으로 사용하면서‘중앙청’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제1공화국 때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했고, 이후 국무총리실을 비롯한 중요 정부부처 청사로 사용되다가 1986년 8월부터는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완전해체를 결정하여 현재는 건물의 돔 부분만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앞을 지나 경무대(현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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