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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4.19혁명의 시작은 2.28대구의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의 철권통치에 기가 죽은 언론과 성인들조차 도를 넘어선 부정과 부패에 대해 제대로 항변을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고등학생들이 떨쳐 일어남으로써 사회적 각성을 촉진시켰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감에 의한 호소인 것이다”라고 고등학생이 전국의 학생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 정신은 곧 마산의 3.15의거의 촉진제가 되어, 경찰의 무차별 발포에 맞서 목숨을 잃으면서도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로 한 단계 발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고려대생을 비롯한 대학생들의 국회 앞 시위와 테러, 그리고 이미 한계점에 다다른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4월 19일 경무대 앞 진격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대학교수들도 시위를 벌이면서 이승만 정권은 더 이상 국민 앞에 버틸 명분이 없었고, 항복선언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4.19혁명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시작단계인 것이다. 4.19혁명이 일어나게 된 사회경제적 뿌리는 일제의 식민지지배에서 비롯된다. 해방 후에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들은 지금까지 사회 곳곳에서 부와 특혜를 누리고 있으며, 제도와 문화의 구석구석에 침잠하여 우리의 정신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과 결탁한 친일의 후예들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켰듯이, 쿠데타를 통해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린 박정희와 공화당 정권은 다시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버렸다. 일제하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그가 맨 처음 시도한 것이 한일회담의 추진이었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굴욕적이고 매국적인 모습은 18년 장기 집권을 통해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일제 잔재의 청산은 물론이로 4.19혁명에 대한 발포책임자와 부정선거의 원흉들이 박정희 정권 하에서 제대로 단죄되지 않았다.
4.19혁명이 완성되는 날은 바로 이런 잔재들을 깨끗이 걷어내고, 우리 사회가 식민지의 잔재를 털어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날일 터이므로 4.19혁명은 지금도 진행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