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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 노동자투쟁과 이석규 열사 장례식

1987년 8월 8일, 거제도 옥포 대우조선 이상용 등 30여명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결성', ‘임금임상’을 외치며 공장안을 돌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대오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지게차와 트레일러를 앞세우고 종합운동장으로 집결하여 결의를 다진 후 옥포 시가지와 충무의 신아조선까지 진출하여 차량시위를 벌였다. 
9일, 이상용을 위원장으로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10일 노조위원장이 회사 측에 회유 당하자 노동자들은 2차로 양동생을 위원장으로 새로운 노조를 결성한 후 3천여 명이 파업농성을 계속하면서 협상을 촉구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협상을 거부하고 4일간 휴업을 결정하였다.
12일, 노조는 기본급 7만원 인상, 상여금 6백%지급, 가족장기근속수당신설 등 14개항 요구했다. 14일부터 가두로 진출한 노동자들은 연일 가두시위와 차량시위를 옥포, 장승포 등지에서 전개했다. 16일, 노사대표 10명이 마라톤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되었다. 19일, 양권식 신부의 중재하에 2차 협상을 시작했다. 
20일에는 5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좌농성에 돌입한 가운데 6차례에 걸친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고 21일, 회사 측은 무기한 휴업을 통보해왔다. 
22일 오후 1시 30분, 거제도 옥포관광호텔 앞에 3천여 명의 노동자와 1천5백여 명의 전투경찰이 대치해 있는 가운데 호텔에서 열렸던 마지막 협상이 결렬되었다. 노동자들의 호텔 진입 시도에 최루탄을 쏘며 해산하던 경찰은 웬일인지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자들은 평화적 시위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20열 종대를 갖춰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50m쯤 전진했을 때, 3면을 포위하고 있던 경찰이 최루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때 한 노동자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스물 한 살의 대조립부 외업반 이석규였다. 오후 3시 30분, 이석규는 대우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 

이석규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노동자들은 "이석규를 살려내라!”며 대우병원 영안실로 모여들었다. 동료들은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 문을 용접으로 봉하고, 24시간 삼엄한 경계를 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변호사 노무현·이상수 등 각계 인사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장례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유족로부터 장례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위임받은 장례준비위원회는 노조 집행부와의 연석회의에서 “장례를 ‘전국 민주노동자장’으로 하고, 장지는 망월동 묘역으로 하되 묘지를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모란공원으로 한다”고 합의했다. 
23일 아침 8시에 실시된 시체부검에서 확인된 이석규의 사망 원인은 오른쪽 가슴과 폐에 박힌 4개의 최루탄 파편으로 인한 산소부족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25일, 김우중 회장이 거제에 왔고, 양 신부 중재 4차례 협상을 진행했으나 결렬되었다. 26일 5시간이 넘는 협상끝에 27일 새벽, 노조집행부와 사용자간 협상이 타결되었다. 김우중 회장과 윤영석 사장 등 회사 간부 20여명은 대우병원 분향소를 찾아 조의를 표한뒤 김우중 회장은 분향소에 모여있는 5천여명의 근로자들에게 연설하였다. 

28일, 오전 7시부터 노동자 지역주민 등 2만여 명의 애도 속에 발인하여 대우조선 운동장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오후 3시경 총 28대의 버스에 분승한 1천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옥포호텔 앞 도로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영구차를 앞세우고 망월동 묘지로 향했다. 그러나 경찰은 차량 행렬이 고성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영구차와 만장차만 통과시키고는 15톤 덤프트럭을 동원하여 도로를 차단한 뒤 시신을 탈취했다. 이어 주변 야산에 잠복하고 있던 2천 5백여 명의 전경과 백골단이 몰려나와 장례집행위원 등 재야인사들의 차와 동문인 광주직업훈련원 출신들이 타고 있던 2대의 버스 창문을 박살내고 문을 강제로 연 뒤 이들을 집단구타하며 강제연행하였다. 이들 연행자 중 이상수, 노무현, 박용수는 구속되었다. 이어 경찰은 1,2호차에 타고 있던 노동자들을 하차시키고 유족 3명만을 태운 채 2개 중대 3백여 명이 탄 6대의 전경버스로 호위하여 남원으로 시신을 탈취, 밤 9시경 폭우 속에서 남원 선산에 시신을 매장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날 전국적으로 개최된 추모제와 관련하여 933명을 연행했으며, 이 가운데 64명을 구속했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등 10여 명을 수배했다. 또 대우조선에서는 해고된 3명 외에 추가로 7명에게 몰래 잠입한 형사계장을 구타했다는 혐의로 살인미수죄를 적용, 구속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탄압국면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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