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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노동쟁의
1987년 7,8,9 노동자투쟁의 큰 물길을 연 현대엔진의 노조결성을 출발점으로 현대계열사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교섭을 시도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이 정주영 회장에게 집중되어 있는 현대그룹에서는 그룹차원의 교섭이 현실적이라는 판단을 한다. 이에 8월 8일 12개 사업장 노조집행부가 모여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의장 권용목 현대엔진 위원장)를 구성한다. 협의회는 3차 (8.11, 14, 17일) 교섭일정을 통보하고 16일, 17, 18일 단결된 투쟁을 전개한다. 이런 단결력에 힘입어 정부는 18일 밤 한진희 노동부 차관을 중재자로 내세우게 된다. 18일 울산 공설운동장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던 현대그룹 계열사 노동자 2만여명은 한진희 노동부 차관의 3개항(1. 9월 1일까지 근로자들이 요구한 임금인상이 타결되도록 약속한다. 2. 정주영 회장은 근로자 대표들과 언제라도 만나 대화하겠으며 회사운영의 전권을 계열사 사장들에게 위임하겠다고 약속한다. 3. 14일 결성된 현대중공업의 신설 노조집행부의 노사교섭대표성을 회사가 인정하도록 보장한다.) 이행약속을 노조집행부가 수락하면서 전원해산했다. 현대그룹 노사분규는 그룹내 7개사의 휴업 이틀만에, 7월 16일 그룹내 최초의 분규가 발생한 지 32일만에 해결됐다.
그러나 8월 19일 어렵게 수습됐던 현대중공업 노사분규가 당초 노사간에 합의됐던 타결 시한인 31일까지 원만한 해결책이 확정되지 못해 노사분규가 재연됐다. 현대중공업 노조측은 회사측이 27일부터 31일까지 4차례 열린 노사협의에서 성의있는 대책을 제시하지 않자 9월 1일 오후1시부터 태업에 들어 가기로 결정했다. 노조대의원 1백80여명이 이날 오후5시 퇴근시간 이후 회사에서 철야시위를 벌이자 2일 출근하는 노동자 1만여명도 파업에 돌입, 농성을 시작했다. 2일 오후 1만여명의 노동자들은 중장비를 앞세우고 거리로 진출 울산시청을 점검하고 농성을 벌였다. 이후 노동자들은 공설운동장으로 옮겨 철야농성을 벌였다. 3일 오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공설운동장에서 회사로 철수, 이중 일부 노동자가 회사 본관 건물에 난입 유리창을 깨뜨리고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 3대를 불태우는 등 시위를 벌였다. 4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8천여명은 회사 운동장에 모여 3일째 농성을 이어갔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키면서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4일 오후 노동자들은 농성을 자진 해산하고, 5일 다시 회사 운동장에 모여 '임금인상'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노조측은 노동부 울산사무소장에게 협상재개 중재를 요청, 이형건 노조위원장과 현대중공업 총무이사가 만나 협상일정 등을 논의하는 예비접촉을 가져 노사협상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그러나 이형건 위원장이 연행되고 노조 집행부가 사실상 와해됨에 따라 협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7일 노동자들은 노조임시집행부를 구성하고 회사측의 무기한 휴업조치에도 불구하고 회사 종합운동장에서 '연행자 석방' 휴업조치 철회' 시위도중 교통사고로 숨진 동료 채태창씨에 대한 충분한 보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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