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678건
더 보기-
시국선언교사 징계상황
등록번호 : 00481033
날짜 : 1991.00.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요약설명 : 나서기 시작한 교직원 관련 내용. 시국선언교사 지역별 징계상황 1.경기도 교육청...
-
시국선언교사 탄압저지 투쟁 속보
등록번호 : 00031164
날짜 : 1991.08.30
구분 : 문서류 > 정간물
기증자 : 윤영규
요약설명 : 시국선언교사 징계에 경기지역교사들 조직적으로 맞서 사설-시국선언교사 대량징계를...
-
취재 및 보도 협조요청서-교수 시국선언 '구조조정의 방향전환과 개혁의 가속화를 요구한다' ...
등록번호 : 00374216
날짜 : 1999.05.14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학술단체협의회
요약설명 : 공공부문 일방적 구조조정에 대한 교수들의 시국선언
사진사료 34건
더 보기-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상임의장 등 각계 원로들의 시국선언
등록번호 : 00709770
날짜 : 1997.01.29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상임의장 등 각계 원로들의 시국선언
-
6월항쟁 11주년 기념 시국선언
등록번호 : 00711753
날짜 : 1998.06.09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서명한 시국선언을 내어 '새 정부의 개혁정치가 후퇴하는 상황을 크게 우려한다'며...
-
문화예술인 시국선언
등록번호 : 00915327
날짜 : 1990.07.19
구분 : 문서류 > 필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한마당 예술극장에서 민중을 탄압하는 노태우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민주화운동사 컬렉션 5건
더 보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요약설명 : ‘김대중’ 조건으로 총 2509 건이 검색되었는데 그중 ‘김대중 내란음모’ 조건으로 총 32 건, ‘김대중 사건’ 관련 187건이 검색되었다. 김대중 씨의 상고이유서(등록번호: 018113)와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의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공판기록>(등록번호: 109927)은 사건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입장과 피해자 김대중 씨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사료이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된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작성한 호소문(등록번호: 115063)과 송건호씨의 아들 송준용의 탄원서(등록번호: 042280) 외에 전두환 정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외문제연구소 발행의 단행본 <누구를 위한...
-
1980년대 통일운동
요약설명 : : 184537), 5월 28일자 전국 67개 단체명의의 <조국통일의 대업을 앞당기기 위한 시국선언-남북 공동올림픽과 6.10 남북 학생회담의 성사를 촉구한다>(등록번호: 221365) 등이 있다. 특이한 것으로는 조영래 변호사의 한겨레신문 사설 자필원고 <한겨레 사설-6.10 남북청년학생회담 관련 원고지 자필 원고> (등록번호 : 431473)와 ‘남북학생회담 추진을 위한 재일교포 학생 연합회의’ 명의의 선언문 <'6.10남북학생회담 참가 지지 결의 연합대회'> (등록번호 : 41043)가 있다. 함석헌 외 30명의 지지성명문 <6ㆍ10 판문점 남북학생회담에 관한 긴급성명> (등록번호 : 94209)도 당시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한 재야...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요약설명 : 양심선언은 사전 또는 사후에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밝힘으로써 당시의 영장 없는 연행, 체포, 구속, 가혹한 고문과 협박에 의해 조작 사건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민주인사들의 진실을 밝히고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이 되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제2차 시국선언-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즈음하여>(등록번호 : 448507)와 <사회정의 실천 선언>(등록번호 : 113734)은 “사회 구조의 모순과 체제의 탄압에 억눌린 자유와 해방과 진실을” 알리고 정치 권력의 비대와 남용을 통제하고 이를 방지하려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여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을...
사료 콘텐츠 23건
더 보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탄생과 시국선언
요약설명 : 공식적인 첫 성명서인 <제1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사제단의 사회현실에 대한 투신의 의지는 이 날 발표한 <제1 시국선언>에서 잘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발표하고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해 오던 상황에서 유신헌법의 철폐와 긴급조치 철회를 주장했던 것이다. 사제단은 시국선언문에서 ‘1972년 10월 17일을 기하여 이 땅의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촌보도 양보할 수 없는 국민의 기본 인권과 존엄성을 짓밟고’ 있는 유신헌법, 노동자와 농민의 수탈과 희생을 강요하는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 긴급조치 하의 납득할 수 없는 인권유린 상황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 한국...
-
민추협_ 1987년 직선제개헌쟁취의 불씨를 당기다
요약설명 :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지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김영삼 총재님이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도 이 시국을 타개할 방도를 마련해야겠소.” 누군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사실, 이 자리에 모인 정치인들은 전두환 군부독재와 싸울 모종의 정치 결집체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날, 58명의 야당 정치인들은 ‘범국민 연합전선’을 추진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조윤형, 박영록, 김정두, 이기택, 황낙주, 박용만, 최형우, 김상현, 김녹영, 김정우, 이중재, 김덕룡, 홍영기 등이 13명이 소인회를 꾸려 김영삼 단식농성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여기에다 101명의 서명을 받은 다음...
-
펜은 칼보다 강하다 -민주화를 향한 문인들의 기개
요약설명 : 보고, 11월 18일 세종로 시위 도중 선언문을 발표할 것을 결정했다. 염무웅이 작성한 이 선언문은 이틀만에 무려 101명의 서명을 받아내어 11월 18일 오전 10시 무렵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인사 30여 명이 광화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실 앞에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낭독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이후 시국 관련 구속 문인들의 석방, 언론ㆍ출판ㆍ집회의 자유를 촉구하는 등 조직적이고 대표적인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 도처에서 불신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은 살기 어렵고, 거짓과 아첨에 능한 사람은 살기 편하게...
구술 컬렉션 20건
더 보기-
이문영
면담자 : 민족문제연구소(윤무한, 김승은)
일자/장소: 2010년 7월 23일/서울 쌍문동 구술자 자택
요약설명 : 교수단 시국선언과 시위는 이러한 순수한 저항을 치다꺼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
변형윤
면담자 : 민족문제연구소(윤무한, 강동민)
일자/장소: 2010년 7월 21일/서울사회경제연구소
요약설명 : 시국선언문 서명자 명단과 관련해, 장면 내각 시절 중 4‧25 교수단 참여 교수를...
-
김윤환
면담자 : 민족문제연구소(장신, 이명숙)
일자/장소: 2010년 9월 28일/민족문제연구소 회의실
요약설명 : 4‧25 교수단 시국선언과 시위 25일 어떤 교수가 모임에 가자고 했으나 그날 약속이 있...
일지사료 78건
더 보기-
각 부 장관 중앙청서 심야까지 대기
일자 : 1960.4.19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정부·여당과 친여세력
요약설명 : 현 시국을 “난(亂) 중에있는 것 같다”고 규정하고, 해결책을 강구해 줄 것을 각료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는 이어 “이 사람들이 학교를 움직여 때려 부수려고 하는 것 같으니 내가 나가달라고 하는 것 같다.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외부에서는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고 반문하였다. 경향신문은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당시 이미) 일련의 시위사태의 본질적 원인이 3·15부정선거에 있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퇴진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거취문제에 대한 여론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있었음이 그의 발언 곳곳에 잘 나타나고 있다”고 서술하였다(『경향신문』, 1990. 4. 19 3면). 이 날...
-
개요
일자 : 1960.4.25
분류 : 시위 상황
요약설명 : 피에 보답하자”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시위 시작 전 14개 항의 시국선언을 채택, 낭독하고 오후 5시 45분 교문을 나와 종로, 을지로 입구, 미국대사관 앞을 거쳐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였다. 교수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당도하여 시국선언문을 다시 낭독하는 것으로 시위를 마쳤다. 이를 본 시민과 학생들은 이 대열에 합세하였고, 교수단이 해산한 후에도 세종로 로터리에 집결, 각종 구호를 외치며 또다시 궐기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로 커다란 자극을 받은 시민들은 “부정선거의 원흉을 잡아내라!”, “형제들의 피의 대가를 찾자!”고 소리를 높였다. 4·19 이후 사회 안정을 위해 애쓰던 군에서...
-
대학교수들의 시위 준비과정
일자 : 1960.4.25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一. 학원의 절대 자유를 보장하라. 一.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사이비 학자를 배격한다. 一. 정치도구화한 소위 문화인, 예술인을 배격한다.성명서 발표를 위한 대회명칭에 대해서도 설전이 있었으나 이 자리에서 결정하지 못하였다. 또한 문안작성자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이상은은 어찌 보면겸양이라 할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책임의 회피 같기도 하며, 또 어찌 보면 각자 발표내용에 대하여 확실한 견해가 서있지 않아 그런 것 같다고 하였다. ‘대학교수단’이라는 명칭은 이상은 교수가 작성한 ‘시국선언(초안)’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이상은, 216-2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