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513건
더 보기-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지도위원 취임 동의서
등록번호 : 00034765
날짜 : 미상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윤영규
요약설명 :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지도위원 취임 동의서 양식
-
[인혁당 사건 공판 기록 변조]
등록번호 : 00517845
날짜 : 197*.00.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이재현
요약설명 : 세칭 인혁당 사건이 군사비밀재판을 받았는데 재판받은 재판기록이 180도 변조되어...
-
인혁당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하여
등록번호 : 00827063
날짜 : 1988.11.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박용길
요약설명 : 인혁당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하여' 자료집 및 지로용지 1. 추모시 2. 인사말...
사진사료 21건
더 보기-
고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인혁당사건 피고들
등록번호 : 00709838
날짜 : 1965.05.29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부장판사)는 인혁당사건의 원심(도예종씨 징역3년, 양춘우씨 징역2년, 11명 무죄)을...
-
인혁당사건 2회 공판에서 검찰 신문을 거부하는 양춘우
등록번호 : 00709839
날짜 : 1964.12.03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인혁당사건 제2회 공판이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도예종씨 등 13명의 피고가 출정한...
-
인혁당 사건 첫공판에서 피고인 도예종 등 13명 모습
등록번호 : 00709842
날짜 : 1964.11.24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인혁당사건 13명에 대한 첫공판이 서울지법 대법정(부장판사 원종백)에서 열렸다....
영상사료 1건
더 보기민주화운동사 컬렉션 5건
더 보기-
제1차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요약설명 : 이 사건과 관련하여 판결문, 도예종의 항소이유서, 신문스크랩, 사진 등 6건의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사건의 발생과 진행과정은 신문스크랩 <인혁당사건관련 자료모음>(등록번호 : 492089)을 통해서 볼 수 있으며, <1차 인혁당 사건 판결문>(등록번호 : 534960)을 통해 박정권의 인혁당 사건 조작 시도가 여실히 무너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인혁당 사건 공판에서 피고자 도예종 등 13명 모습>(등록번호 : 709842)에서는 1차 인혁당 관련자의 면면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1차 인혁당 사건의 시발이 되었던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관련하여 145건의 사진이 소장되어 있다.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
요약설명 : 인혁당 사건 진상을 조사 발표하면서>(등록번호 : 108139), <정부 당국에 묻는다[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등록번호 : 207832), <성명서-광주,전주 교구 사제들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에 동참하면서>(사료번호 : 392986), <박군 고문사망 사건에 대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성명서>(등록번호 : 44259), <문규현 신부 방북 관련 자료>(등록번호 : 206835), <고 김기설씨 유서공방사건의 공정한 공개수사를 촉구하며>(등록번호 : 479995) 등은 민주화운동사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조차도 신변의 위협을 심각히 느껴야 했던 중요한...
-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
요약설명 : 사료관에는 기증자인 박용길 장로가 구가협 활동을 하며 사용했던 각종 박물류가 소장되어있는데, ‘빅토리 숄’인 <어깨숄>(등록번호 : 057144)을 비롯해 3·1민주구국사건 때 사건 관련 구속자가족들이 시위용으로 제작해 법원까지 들고 간 “민주인사 석방하라” 등이 써있는 부채(등록번호 : 033704)와 남편 문익환 목사의 수형번호가 적힌 시위용 <보라색 원피스>(등록번호 : 33709)와 한복(등록번호 : 033711) 등 희귀자료들이 특기할 만하다. 이외에도 구가협이 제작 배포했던 각종 성명서(등록번호 : 480358외), 호소문(등록번호 : 479704외), 항의서(등록번호 : 479709) 등이 50여건 소장되어 있다. 양심범가족협의회...
사료 콘텐츠 25건
더 보기-
인혁당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요약설명 : 암흑의 날'이라 규정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사건이 조작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인혁당사건 32년만인 2007년에 열린 재심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무기징역 등의 형을 살았던 17명에게도 2008년부터 2013년에 걸쳐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옥고를 치른 17명 중 16명의 가족들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2009년 6월 19일 인혁당 관련자 16명, 가족 포함 총 77명의 원고 앞에서 법원은 "국가가 배상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미 17명 중 4명이 옥사나 복역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였다. 재판부는 국가의 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의 기산일을 1975년...
-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_ 공포정치의 산실 중앙정보부
요약설명 :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만들어 냈다. 도예종, 이수병, 여정남 등의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 전복을 위해서 대학생을 조직하고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거짓이었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자비한 폭력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중앙정보부의 슬로건은 차라리 ‘없는 간첩도 만들어 내어라!’가 더 맞았을지 모른다. 잠 안 재우기, 인간성을 부정하는 쌍욕, 발길질, 주먹질, 몽둥이질, 무릎에 각목을 끼우고 짓밟기는 예사였고, 나중에는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고문과 전기고문까지 서슴지 않았다. 합법적 수사기관인 경찰과 검찰이 있었지만 중정은 그 모든 것 위에 있었다....
-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
요약설명 : 요구했다. 인혁당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속중인 전창일의 아내 임인영은 인혁당 관련자들을 공개재판을 통해 납득할만한 죄를 받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밤 8시 명동성당 앞 성모상 동굴 앞에서 2부 기도회가 열려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된 김윤의 언니인 김영과 김학민의 아버지 김윤식 등은 긴급조치로 구속된 학생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인권유린의 현실을 폭로했다. 인혁당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구명운동을 비롯한 인권문제와 민주화운동 지원 등 한국 정부에게 눈엣가시 같은 활동을 하다가, 12월 14일 강제추방을 앞둔 조지 오글 목사도 이 기도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나오지 못하...
구술 컬렉션 27건
더 보기일지사료 96건
더 보기-
전남 광주에서 2대악법 반대 시민궐기대회 개최
일자 : 1961.4.1
분류 : 2.8한미경제협정 및 2대악법 반대운동
요약설명 : 장송데모”라는 명목으로 상여를 선두에 세우고 남광주역까지 행진하였다.『민국일보』 1961. 4. 1 석3면 ;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혁명재판사』 3,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1962. 1119쪽. 김세원에 따르면 이날 궐기대회는 “칠순의 김철 선생과 환갑의 김주 여사가 선두에 서서” 가두행진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날 시위에는 사회당·통일민주청년동맹의 활동가 전원이 참여했다고 한다(김세원·한상구, 「4월혁명 이후 전위조직과 통일운동-사회당·인혁당·남민전」, 『역사비평』 15, 역사비평사, 1991, 407쪽). ※ 글이 실린 기사에는 4월 1일과 2일에 연이어 집회를 한 것으로 쓰여 있으나 글의 맥락과 당시 기사를...
-
도예종·김정강학생데모 배후로 수배
일자 : 1964.7.6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학생 데모를 공산 세력이 배후에서 조종한 증거 문건을 압수하고, 도예종(당시 41세, 1975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과 김정강(서울대 정치학과 3년)을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 소요 등의 혐의로 각각 현상금 10만 원씩 전국에 수배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7월 18일 내무부장관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집결체인 불꽃회가 학생 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며 김정강과 김정남 등 30여 명의 이름을 계보도와 함께 발표했다. ‘불꽃회 사건’이 터진 것은 김정강이 조직 구상을 하면서 메모해 둔 노트가 경찰에 입수됐기 때문이었다. 김정강에 의하면, 불꽃회는 김정강과 김정남(서울대 정치학과 4년)이 1964년 초에 만든 서울대...
-
“북 지령 받고 국가변란음모 지하조직” 중앙정보부, ‘인민혁명당’ 41명 구속
일자 : 1964.8.14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정부·여당·군
요약설명 : 「민족일보·인혁당 사건의 전말」, 『신동아』, 1985년 6월호, 336쪽)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정권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거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다시피 하는 용공조작사건의 전형을 보여준 시초였다. 그러나 고문으로 조작된 조직사건을 통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던 박 정권의 시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인혁당 사건의 망령은 10년 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 중앙정보부장과 중앙정보부 5국 대공과장이었던 이용택 중정 6국장의 손에 의해 또다시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부활하게 된다.『사료해제집 제1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74~75쪽. 이상우, 「민족일보·인혁당 사건의 전말」,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