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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개화

70년대 노동운동은 전태일의 분신으로 시작해서 YH 여공 김경숙의 죽음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절규하며 분신자살하면서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60년대 외자도입에 의한 성장 일변도, 대기업 중심으로 추진한 경제개발정책은 60년대 후반부터 부작용을 노출하기 시작한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아온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분출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부는 70년 1월에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하여 사실상 노동운동을 금지했다. 전제로 추진된 성장 제일주의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기업의 부실화로 인해 임금체불과 기업 도산이 이어졌다.
반면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으며, 특히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으로 인해 단위 사업장 근로자의 수가 대규모화되어 노동조합의 결성에 유리한 조건들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노동자들과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학생들은 직접 노동자로 변신하여 학업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에 취업하여 노조를 결성하고 야학을 개설하여 노동운동을 확산시켰다. 여기에 도시산업선교회, 크리스천 아카데미, 가톨릭노동회 등도 노동자들의 교육과 조직에 앞장섰다.
청계피복노조, 동일방직, 원풍모방, 반도상사, YH무역, 콘트롤데이터 등에서 속속 노조가 결성되어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투쟁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노조들 간의 연대투쟁도 속속 조직되었다.
이에 대해 사용자와 정권의 탄압도 강도를 더해갔다. 노조 파괴공작이 공공연하게 진행되었다.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면 주동자들을 상대로 회유, 매수, 협박, 납치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려 하였다.
마침내 79년 8월 YH 무역의 여공들이 야당인 신민당 당사를 점거하고 체불임금 해결과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고, 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에서 김경숙 양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결국 유신체제 몰락의 서곡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