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보는 4∙19혁명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1960 4∙19혁명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자유당 정권은 선거 이전부터 치밀하게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권력을 이용하여 자유당 선거 유세장에 국민들이 많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하거나, 정치적 라이벌인 민주당 선거유세장에는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다.





1960년 2월 28일 경북고등학교를 비롯한 대구시내 고교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자유당이 대통령 선거 유세와 관련하여 민주당 유세날인 28일(일)에 특히, 정치에 민감한 고교생들이 유세장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일제히 등교시켰기 때문이다.


질문시위 구호 내용을 통해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해답

정치에 학생들을 끌어들이지 말라. 자유당의 정치적 욕심에 학생들을 이용하지 말라는 의지가 담겨있다.

1960년 3월 5일 서울에서도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이 날은 서울운동장에서 민주당 선거 연설회가 있던 날로 참가한 학생들이 연설회가 끝난 후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질문대구 학생시위에서 나온 구호와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생각해 보자.
해답

단순히 학생들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뜻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 정치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바꾸기 위해 학생들이 나서자고 얘기하고 있다.

다음 사진은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군의 사진이다. 이 사진을 기초로 자유당이 학생들의 시위에 어떻게 대응했을지 생각해 보자.

최루탄이 머리에 박히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신 [사진원본보기]

자유당이 학생들의 시위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자료보기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시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함께 동참하는 전국적인 시위로 커져갔다. 최루탄과 총을 발사하며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정부에 국민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정부가 '난동자 뒤에 공산당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며 시위대를 공산주의자, 북한의 간첩으로 몰아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지역별 시위의 확대과정을 지도에서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