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마산의 유신반대운동
유신 선포 후 부산에서는 1973년 12월 부산대학생 시위가 있었고,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부산대학생들이 구속되었다. 또 1974년 10월 동아대학생들의 시위와 부산일보와 국제신문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이 있었다. 같은 해 11월부터 천주교의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열리는 등 민주화의 열기가 높아가다가 1975년 5월 긴급조치 제9호 이후 일시 침체기가 있었으나 1976년 2월 책방골목사건, 11월 국제사면위원회 부산지부 결성, 1977년 4월 부산도시산업선교회 설립, 1978년 4월 양서협동조합협동조합경제적으로 약소한 처지에 있는 농민이나 중·소 상공업자, 일반 소비대중들이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정신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물자 등의 구매·생산·판매·소비 등의 일부 또는 전부를 협동으로 영위하는 조직단체. 설립, 4월 부산대 민주투쟁선언문 살포 사건, 5월 동일방직 노동자 선거법 위반사건, 1978년 7월 부산대학교 교내 페인팅 사건, 10월 박상도 등 재야인사 구속사건, 11월 조화순 목사 구속 사건, 1979년 4월 3·1구국선언문을 배포한 노경규 등 구속사건 등 각 분야의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히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학생과 노동자, 재야인사들의 재판 방청과 석방촉구 기도회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서 양서협동조합 등을 통해 연대하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을 언론이 보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소식들은 손으로 쓴 유인물을 통해 전달하거나 입에서 입으로 전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유인물유인물등사기, 인쇄기, 프린터 따위를 이용하여 만든 인쇄물, 부마항쟁 당시의 유인물은 전부 등사기로 제작한 인쇄물이었음, 편지, 말 등으로 전달하다가 발각되어도 긴급조치 위반이 되어 감옥살이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하여 믿는 사람이 아닌면 이런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어떻게 민주화운동과 연결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