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제공 :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유신 정권은 YH무역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의 김영삼은 국회의원직까지 박탈당했다. 이에 1979년 10월 16일, 부산 지역의 대학생 7,000여명으로 시작되었던 시위가 마산과 창원 대구 등지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부마항쟁에서 민중들이 보여준 저항으로 유신정권의 내부는 분열되기 시작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충성스런 부하였던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개인적 라이벌 의식을 가졌을 뿐 아니라 부마사태에서도 다른 의견을 보였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 결국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업무수행과정에서 무능을 드러내 대통령 각하로부터 질책을 받아왔을 뿐 아니라 ... 자신의 해임을 우려한 나머지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아보겠다는 망상으로 기회를 노려 범행을 저질렀다."
10.26혁명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정권욕도 없고 사리사욕도 없었다.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의 회복 보장되었다. ... 체제 반대와 민주회복의 소리가 높아가고 긴급조치가 발동됐고 많은 사람이 구속됐다. 민주회복의 불길을 꺼지지 않았고 계속 오르고 있다. 정보부장으로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유신체제를 유지하자면 정부과 국민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예상됐다. 이대통령과 박대통령을 비교해보자. 본인은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유신체제의 지주를 담당했던 내가 방관할 수 없어 원천을 두드려 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