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마산의 유신반대운동
부마항쟁에서 검거된 시민은 총 1,563명이며 이 중 87명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아 20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유신정권은 붙잡힌 시민들에게 가혹한 구타와 고문을 가했으며 적극적으로 가담한 학생과 민중들은 감옥에서 징역징역일정기간 교도소 내에 구치(拘置)하여 정역(定役)에 종사하게 하는 형벌(형법 67조).을 살기도 했다. 그러나 10∙26정변이 일어남으로써 구속된 사람들은 선고된 형기보다 일찍 석방되었다.
부마항쟁이 발생한 지 열흘 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사살함으로써 유신체제를 붕괴시킨 10∙26정변이 일어났다. 10∙26정변은 부마항쟁 등을 둘러싸고 강경 탄압을 주장하는 박정희, 차지철과 온건한 대응을 주장한 김재규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어 일어났고 결국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김재규는 전 국민이 열망하는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정변을 일으켰으며 그 열망을 증거하는 것이 부마항쟁이라고 생각했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행동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생각해 보자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시국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자신의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선거를 실시하여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방향은 국민 대다수가 바라고 있는 유신헌법의 개정을 포함한 정치적 발전을 합헌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나가겠다고 천명하였다. 이후 긴급조치 9호 해제, 구속인사 석방, 복권복권법적 자격이 상실 또는 정지된 자의 자격을 회복하는 일. 헌법∙사면법상의 복권은 대통령의 은사(恩赦)의 일종으로서, 형의 언도로 인하여 법령의 정한 바에 의한 자격이 상실 또는 정지된 자의 자격을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정치적 사유나 국가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 또는 국경일(國慶日) 등에 행해진다. 대통령령인 복권령(復權令)을 공포하여 그 복권령에서 정한 요건에 해당하는 모든 자에게 효과를 미치게 하는 경우의 일반복권과 특정한 자에게 대해서만 행하는 특별복권의 경우가 있다. 등이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불렸던 유화적 시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신군부의 쿠데타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전략) … 본인은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지금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내외정세를 개관하고 당면한 국정의 기본방향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한편 우리나라는 지난날 온갖 시련을 극복하면서 국력배양에 힘써온 결과 경제사회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이러한 경제 사회적 성장에 상응하여 정치적 발전도 도모해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원하고 있는 바라고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 이러한 국가적 관점에서 볼 때 헌법문제를 포함한 정치적 발전 문제는 신중하고도 진지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합헌절 절차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다루어져야만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 (하략)
자료제공 : 한국일보 1979년 10월 20일
부마항쟁이다.
(전략) … 최대통령은 이날 하오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지난 75년 5월 13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했던 긴급조치 제9호를 8일 0시를 기해 해제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에 따라 8일 0시부터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 중인 학생과 일반인을 전면 석방할 예정이다. 그러나 정식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된 자에 대한 공민권 회복 등을 포함한 특별 사면은 다소 시간적인 여유를 두었다가 시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통령 당선 후 처음 열리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긴급조치 제9호 해제에 따른 긴급조치 제10호」를 의결한 후 최대통령이 이에 따른 특별담화를 발표할 예정이다. … (중략) … 또 정부측은 제적 학생의 구제 절차는 복권의 절차 없이 학칙 개정을 통한 복교 조치로 구제키로 했다고 밝혔다. … (하략)
자료제공 : 경향신문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2월 8일 자정을 기해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였다. 이와 함께 구속인사 68명이 석방되고 불구속 재판이나 수사를 받고 있는 2백 24명도 면소 또는 불기소 결정을 받게 되었으며 김대중 씨에 대한 가택연금도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