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9일 이한열을 비롯한 연세대학교 학생 2천 여 명은 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6∙10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연세대 궐기대회를 열었다. 오후 5시, 교내 궐기대회를 마치고 교문 밖으로 행진하려던 학생들의 행렬 맨 앞에는 이한열을 비롯한 학생들이 있었다. 무장 경찰들은 학생들의 행렬을 막고 최루탄을 마구 쏘아댔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최루탄 연기가 가득했다. 그때 한 학생이 쓰러졌다. 바로 이한열이었다.
쓰러진 이한열은 연세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이내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국민운동본부의 제안에 호응하여 오후 6시부터 대한성공회 성당 종탑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성당의 종이 42번이 울리며 시작된 시위는 이전과는 달리 일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고 시민들은 손수건을 흔들며 시위대를 응원하였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헌법을 민주적으로 고치는 것.
경찰들은 예정 장소인 대한성공회 성당의 입구를 막아 대회를 원천봉쇄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국민운동본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시위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시위 진압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하고 사복 체포조를 동원하여 10일 하루 동안 3,831명이 검거되었다. 여기저기서 밀린 시위대는 6월 10일 저녁 명동성당에 집결했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 항쟁 종료를 선언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아서 계속 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국민운동본부 간부가 체포되었지만 시위의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명동성당 집회는 종료되었지만 전국적으로 시위는 계속되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인한 인명피해에 항의하고 나아가 정권의 폭력적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16개 도시 247개소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최루탄추방대회는 참여 시민이 더 늘었고 지방으로 시위가 크게 확산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26일 개최하기로 하였다.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00여 만 명이 참가하였다. 연일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경찰은 전 국민적 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