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보는 5∙18민주화운동

광주여 무등산이여!
1980 5∙18민주화운동광주여 무등산이여!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희상자의 속출

  •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시신 [사진원본보기] 자료제공 : 경향신문

  • 도청 앞 광장에 희생자들의 관을 옮기는 유가족들 [사진원본보기] 자료제공 : 경향신문

  • 병원에서 치료받는 부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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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엄군의 광주 봉쇄 작전 [사진원본보기] 자료제공 : 경향신문

5월 19일 계엄군의 첫 발포가 있었고 5월 20일 밤 광주역 앞에서도 발포가 이어져 다수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계엄군의 발포가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5월 21일 오후 1시였다.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아침부터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수십만의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도청 주변 곳곳에서 계엄군과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퇴각을 요구하였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21일 오후 1시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 방송이 시작되자 비무장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 집단발포를 시작하였다.

금남로는 시민들이 흘린 피로 피바다를 이루었다. 평화적 해결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넋을 잃었다. 시위와 상관없이 주변 건물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계엄군은 조준사격을 하여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총기를 확보하기 위해 전남의 여러 곳으로 진출했다. 시민들은 전남지역을 누비면서 계엄군의 극단적인 진압에 함께 항거할 것을 호소하고, 이에 맞서려면 자신들도 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에서 온 시민들은 전라남도 각 지역민들과 연대해 경찰서나 예비군본부 등에 보관되어 있던 무기들로 무장하는 한편, 광주로 무기를 이송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시민군'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계엄군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항거가 이루어졌다. 그러자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는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른 지역과 고립된 광주의 외로운 항거를 의미했다.

광주에 소재한 병원들에는 총상을 입은 환자들로 넘쳐났다. 의료인들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부족한 혈액을 충당하려는 시민들의 긴 헌혈 대열이 등장했다.

자치공동체의 탄생

  • 자치공동체

    광주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이 쏟아져 나와 주먹밥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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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용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격려하며 물 한 바가지를 건네는 소녀 [사진원본보기]
    자료제공 : 경향신문

  •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배포된 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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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문

유신잔당과 전두환쿠테타일파는 이제 더 이상 민족반역의 살인극을 즉시 중단하고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으라! 우리는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민주투쟁을 위해 죽음을 각오할 것이다. 이 나라의 장래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우리의 결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1. 껍데기 최규하 정부는 즉각 물러가라. 2. 살인마 전두환을 즉시 처단하라. 3. 구국과도정부를 민주인사들로 구성하라. 4. 구속중인 학생들과 모든 민주인사들을 즉시 석방하라. 5.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6. 휴교령을 즉각 철폐하라. 7. 언론은 광주시민의 참상을 철저히 보도하라. 8. 정부와 언론은 전남인과 경상인의 지역감정의 왜곡보도, 허위조작을 하지 마라. 9. 천인공로할 발포명령을 즉시 중단하라. 이 길만이 현 시국을 수습하는 유일한 길임을 역사의 이름으로 준엄히 선언한다. 1980. 5. 22. 전남민주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전남민주청년 연합회 전남민주구국학생 총연맹

5월 23일, 고립된 광주는 '질서 유지와 시내 청소'를 하며 시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시민군에게 공급할 주먹밥을 만들고 빵과 음료수를 자발적으로 모았다.
당일 밤부터 전남도청의 시민군들은 여러 가지 긴급 사안들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5월 24일의 최대 논쟁점은 '무기 반납'이었다. 계엄군은 무기를 무조건 반납할 것을 종용하고 협박했다. 이를 두고 대치하던 자치결사체는 계엄군과 아무런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의 무기 반납은 그 간의 희생을 무화하는 것으로 의견을 수렴해갔다.

5월 25일, 전남도청의 시민군과 자치결사체는 신 군부와 계엄군의 인식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시민결사체와 계엄군 사이의 협상은 성과 없이 결렬되었고, 계엄군은 당일 ‘밤 12시까지 무장해제하라’고 통보했다. 이것은 상황의 호전이 아니라, 점점 악화되어 더 큰 비극으로 치달을 것임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정세의 변화는 시민결사체의 인식과 구성원에 변화를 가져왔다. 투항파들은 도청을 떠났고 시민군들이 계속 남아 계엄군과 대처하게 되었다.

자치공동체의 기간동안 경찰이 없는 상황에서도 광주 시내에서 단 한건의 강도, 절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광주시민의 도덕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세계사에 유례없는 사례였다.

광주사태를 보도한 신문기사 자료제공 : 경향신문 1980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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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를 보도한 신문기사

광주사태 계속 긴장

"과격난동자 회수무기 탄약탈취
강경투쟁선동... 살벌분위기 팽배"

계엄사 25일 하오 발표문



계엄사령부는 25일 저녁 8시 발표문을 통해 광주소요사태는 질서가 잡혀가는 듯 했으나 이날부터 과격파 난동자들이 회수된 무기와 탄약을 재차 탈취하고 강경한 투쟁을 선동함으로써 살벌한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다고 밝혔다. 계엄사 발표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 5월 18일 수백명 학생의 평화적 시위로 시작된 광주일원의 소요사태는 타 지역 불순인들 및 고정간첩들이 광주일원에 잠입하여 터무니없는 악성유언비어를 유포시키고 파괴ㆍ방화를 선동하며 방산업체의 군사장비와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를 탈취하도록 자극하고 앞장섬으로써 시위사태는 폭도화 되어 유혈 사태를 야기 시켰으나 ▲정부당국과 계엄군의 적극적인 선무활동과 시민들의 자제로 5월 22일부터 시민자체적인 수습의 기미를 보여 폭도들에 의해 약탈된 무기와 탄약의 부분적인 회수는 물론 많은 시민들에 의해 시가지 청소를 하는 등 질서가 잡혀가는 듯하다가 ▲5월 22일부터 과격파 난동자들이 도청을 비롯한 주요 공공건물을 재차 확보하고 수습위원회가 회수한 무기와 탄약을 재차 탈취하여 강경한 투쟁을 선동, 그동안 군은 ▲광주시내로 잠입, 소요를 진압시킬 수도 있었으나 폭도는 물론 시민들의 희생을 방지코자 선무활동에 주력하는 일방 외부 불순세력이 대거 침투하여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해왔으며 ▲폭도들에 의해 수차 공격을 받아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고, 군인을 난자한 만행을 목격하고서도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자제하면서 수습위원들과 대화는 물론 스스로 평정을 되찾도록 당부하는 전단을 살포 ▲또한 군은 불안에 떨고 있는 시민들을 걱정하면서도 질서회복에 앞장서는 수습위원들의 호소에 폭도들이 순응하기만을 기다려왔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격파들은 ▲5월 24일 하오 학생결사대를 조직,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일방, ▲가두방송을 통해 『계엄사의 모든 발표는 전부 허위이므로 시민들은 속지 말라. 식량ㆍ실탄ㆍ연탄을 비축하자』고 선동하면서 장기투쟁을 벌일 준비를 하고, ▲5월 25일 상오 투쟁목표와 방식을 위요하고 온건파와 강경파가 대립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도청 등 주요 공공건물의 경비를 강경파 학생이 장악했으며 ▲5월 25일 하오에는 『장기전에 대비할 것이니 시민들은 식량을 아끼라』고 하면서 『변두리 지역의 강도 행위는 계엄군의 짓이다』고 매도하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팽배되어가고 있음. 강경파 폭도들은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 외에도 깡패, 양아치, 건달 등 불량배들로 구성되어있어 ▲이들은 약탈행위를 자행, 가가호호 방문하여 쌀, 음료수, 담배, 침구 등은 물론 금전까지도 강제 각출했으며 ▲약국, 금은방 등에 침입, 강도질은 물론 수퍼마키트에 침입, 현금을 강탈했는데, ▲이들은 나이가 19~20세에 불과한 자들이 많아 군대 경험이 없어 무기를 제대로 조작하지 못함으로써 오발사고가 비일비재하고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음. 한편 폭도 중에는 고정간첩 등 불순세력이 개재되어 있어 ▲ 시민들이 파괴와 방화를 충동질하는 자들을 검거, 계엄군에 인계한 바 있지만 아직도 ▲일부 폭도가 신분에 맞지 않는 군용지도를 소지하고 있으며 ▲『계엄군과 싸우자면 한국화약 탄약 보급소를 습격, 많은 무기를 탈취 확보하자』고 선동하는 자가 있고 『교도소를 습격하자』고 충동질을 계속하는 가 있는데 이는 사상범 등 중범죄가가 3천 7백여 명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를 습격, 이들 중범죄자를 폭도에 가담시키려 획책하며, ▲탈취한 차량 회수차 도청사무실에 갔던 아시아자동차 경비원 김익중씨가 5월 25일 상오 8시 30분 목격한 바에 의하면 신원미상의 2명이 『독침이다』고 외치며 밖으로 나오다 쓰러지자 신원미상의 1명이 상처부위를 빨아주다가 역시 쓰러져 생명이 위독한 상태임. 8일간에 걸친 장기소요사태로 말미암아 ▲일반 시민들은 완전 치안 공백상태에서 주ㆍ부식 구입이 곤란하여 라면ㆍ짬뽕으로 끼니를 대신하고 있으며 ▲많은 상가의 철시로 인해 생활필수품의 구입조차 어렵게 되었고 ▲품팔이 행상 등 하루 벌어 그 날 그 날 생활을 영위하는 극빈자들의 생계문제는 심각한 실정. 대다수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로 정부 당국의 조속한 질서 회복을 갈구하고 있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교외로 피신코자하나 폭도들이 골목골목 지키고 있고 외곽도로를 차단하고 있어 전전긍긍하며 ▲심지어 전국소년체전을 위해 합숙 훈련 중이던 선수와 임원 4백 명을 폭도들이 귀향시켜주지 않아 공포에 떨고 있고 ▲치안 공백 상태에서 폭도는 물론 강도들이 밤마다 약탈행위를 자행, 양민들을 공포속에 몰아넣으며 ▲특히 폭도들이 『7함대는 우리를 위해 왔다.』고 선동하면서 예비군들이 시민유격대 가입을 협박하고 있음. 따라서 시민들은 ▲야음을 이용한 폭도들의 각종 횡포 및 약탈 등으로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있으며, 정부와 계엄군의 질서회복을 바라고 있음.」

최후의 항쟁

80만 민주시민의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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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만 민주시민의 결의 (5월 26일)

80만 민주시민의 결의

민주시민 여러분! 승리의 그날을 점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번 "광주시민의거"는 전남북의 각 시군을 거쳐 부산, 마산, 서울, 충주 등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으며 전국 중앙기자협회는 더 이상 허위보도를 하지 않기 위해 총파업을 단행하며 현재 일체의 신문도 발간이 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각 외신들은 광주시민의거를 사실대로 보도하고 있어 현 광주시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또한 미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2척이 부산에 정박하며 전두환 일파의 더 이상의 무모한 만행을 견제하고 있으며 군부자체 내에서도 알력이 생겨 전남사단과 향토사단에서는 전두환 일파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있어 전두환의 멸망은 머지않아 확실합니다. 시민 여러분 힘을 내십시요! 우리 80만 시민만 똘똘 뭉치면 분명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민주 사회"를 안겨주도록 우리 모두 끝까지 투쟁합시다.



- 80만 민주 시민의 결의 -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나라! ◦무력탄압만 계속하는 명분없는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노라, 살인마 전두환을 공개 처단하라. ◦구속중인 민주인사를 즉각 석방하고, 민주인사들로 구국과도정부를 수립하라.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보도하지 말라.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피해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수립"을 요구한다.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우리 80만 시민일동은 투쟁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선언하다. - 80만 민주 시민의 결의 - 1980. 5. 26

5월 26일 오전, 계엄군의 탱크가 도심으로 진입해왔다. 전남도청에 있던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항쟁 지도부는 몸으로 탱크의 행진을 가로막고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계엄군의 탱크는 광주 전체에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시민군은 최후 항전을 다짐했다.

오후 3시 5ㆍ18민주화운동의 마지막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들은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민주사회를 안겨주도록 우리 모두 끝까지 투쟁합시다."라고 다짐했다. 오후 5시 계엄군은 진압 계획을 시민군에게 통보했다. 이제 시민군의 선택은 '항쟁의 의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아서 항쟁의 의의를 계승할 것인가' 뿐이었다. 시민군과 자치결사체는 최후의 항전을 치를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귀가 조치시켰다.

  • 도청으로 향하는 계엄군의 탱크 [사진원본보기] 자료제공 : 경향신문

  • 도청 앞에 앉아 있는 계엄군들과 계엄군 헬기 [사진원본보기] 자료제공 : 경향신문

  • 도청을 점령한 탱크에 탄 계엄군 [사진원본보기] 자료제공 : 경향신문

  • 계엄군에 의한 전남도청 진압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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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새벽 4시경, 계엄군은 시민군과 시민자치결사체의 본부가 있던 그리고 최후 항전지였던 전남도청을 향해 몰려왔다. 탱크와 헬기로 중무장한 수천 명의 계엄군과 칼빈, M1 등의 구식무기로 무장한 수백명의 시민군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시간 10분 만에 전남도청에서의 항전은 끝이 났다.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을 비롯해 다수의 시민군이 계엄군에 의해 학살되었고, 수백명이 부상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로서 장장 10여 일에 거친 5ㆍ18민주화운동은 종료되었다. 당시를 경험한 시민들은 계엄군이 진입하면서 내던 군화발 소리와 각종 진압장비들에서 발생한 굉음 그리고 총격전 소리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상한다.



질문 5·18 당시에 정부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5·18사태'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5·18민주화운동'이라 한다. 동일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처럼 명칭이 시대에 따라 변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