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도 밀사의 역할이 컸다. 2000년 박지원 문화부 장관이 밀사가 되어 중국의 상해와 베이징에서 북한의 송호경 아시아
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과 만나 정상회담을 합의하였다. 그것이 3월과 4월초의 일이다. 정상회담이 원칙적으로 합의 된 이후 임동원 국정원장이 비밀리에
방북한다.
임원장은 5월말과 6월초 두 번 비밀 특사로 방북하였다. 당시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금수산 기념궁전 방문을 요청했으나 우리는 국민정서를 이유로
거부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분단이후 최초의 정상회담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은 과거 7∙4 공동성명이나 남북기본합의서과 비교해 볼 때, 구체적인 합의사항을 담기 보다는 남북관계의 추진 방향에 관련된 원칙을
합의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은 5개 항의 포괄적인 합의로 이루어졌다. 구체적인 항목별 합의보다는 공존을 강조하고, 실질적인 화해∙교류∙협력이 이루어지는 정치적 신뢰를 담았다. 공동선언의 2항, 즉 남과 북의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하고 앞으로 협의해 나간다는 합의는 다양한 해석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교류협력의 원칙에 대한 합의는 이후 실질적인 협력의 계기를 제공했다. 정상회담이후 장관급 회담과 경제협력 추진위원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협력 사업들이 이행되었다.
2000년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게 되는 배경에는 현대의 금강산 관광 사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에서는 감동의 행위 예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 소떼
방북이 있은 지 2년 후에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비무장지대의 지뢰는 제거되고 철조망이 걷히고, 도로가 났다.
소떼가 분단의 경계선을 거슬러 올라간 이후 동해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배가 떠날 수 있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가장 열렬히 환영한 사람들은
이산가족들이었다. 1998년 11월 18일 첫배를 탄 일반 관광객 835명중 45%가 이산가족들이었다. 2000년 정상회담이후부터는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금강산에서 이루어졌고, 2005년 8월에 착공한 이산가족 면회소는 2008년 초 완공되었다.
금강산 관광은 또한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98년 11월 20일 저녁 클린턴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서 서울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그는 숙소인 신라호텔에서 두 번째 관광선 봉래호가 떠나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다. 21일 정상회담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그러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한반도 위기를 외치는 강경파들을 잠재웠고, 한반도의 안보상황을 우려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다.
2000년 정상회담은 남북관계를 '접촉이 없었던 시대'와 '접촉의 시대'로 구분할 만큼 다양한 교류협력의 계기가 되었다. 정상회담이후 장관급 회담과
경제협력 추진위원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협력 사업들이 이행되었다. 남북경협의 제도적 장치와 관련, 남북한은
4개의 투자 관련 합의서4개의 투자 관련 합의서4개의 합의서는 <남북 사이의 투자보장에 관한 합의서>, <남북 사이의 소득에 대한 이중과세방지 합의서>, <남북
사이의 청산결제에 관한 합의서>, <남북 사이의 상사분쟁 해결 절차에 관한 합의서> 등이다.
를 발효하였으며, 원산지 증명, 직접교역체제의 정비, 무역사무소 개설 등을 합의했다. 그리고 개성공단과 철도∙도로의 연결, 이산가족 상봉,
사회문화교류 등, 남북관계를 6∙15선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정도로 많은 진전을 이루는 계기를 제공했다. 철도∙도로 연결은 2000년 7월에 개최된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과 8월에 열린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 철도(서울~신의주) 및 도로(문산~개성)를 연결키로 합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2002년 8월 제7차 남북장관급회담 및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개성공단건설의 착공'에 합의하였다.
1989년 남북교역이 시작된 초기에는 2천만달러에도 미치지 못하였던 교역규모가 2002년부터 남한이 중국에 이어 북한의 제2교역상대로 부상하게 되었다.
남북관계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환경에 영향을 받으면 진행된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남북 회담에서 북핵문제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초반 남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할 정도로 활발히 대화했지만, 곧이어 터진 이른바 '북핵 문제'로 긴장관계로 돌아갔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강경정책의 배경이 되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후 남북관계의 가다서다 현상을 반복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북핵문제의 악화는 남북 당국간 관계의 신뢰를 약화시켰고, 개성 공단 등 협력사업의 속도를 지연시켰다. 또한 한미간의
'북한문제'를 둘러싼 입장차이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남북관계와 북핵문제가 서로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1985년 남북 고향방문단 교환방문 사업이후 이산가족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5년이 흐른 이후 인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부터 이산가족 상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2000년 8월 15일 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이후 2007년까지 16차례의 상봉행사를 가졌다. 2007년말까지 3,443건 1만 6천여명의
이산가족이 상봉의 기회를 가졌다.
2005년 8.15부터는 화상상봉을 시작했다. 광케이블이 연결되었고, 장비는 남쪽 것으로 소프트웨어는 북쪽의 조선컴퓨터센터가 만든 것으로, 서로 호환
가능한 화상 상봉체제를 갖추었다. 2007년말까지 화상상봉은 557건 3, 748명을 기록했다.
더 많은 이산가족들이 만남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2008년까지 대한적십자사에 상봉을 신청한 이산가족은 12만 7,323명이다. 이중 30%인 3만 8249명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신청자 중 70세 이상 고령자가 74.5%다. 해마다 3천에서 4천 명 정도가 고향을 그리며, 형제 자매 아들 딸들을 그리며, 눈을 감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사망자의 비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단위: 건)
구분 / 연도별 | '85 | '00 | '01 | '02 | '03 | '04 | '05 | '06 | '07 | 총계 | |
---|---|---|---|---|---|---|---|---|---|---|---|
당국 (건) |
생사확인 | 65 | 792 | 744 | 261 | 963 | 681 | 962 | 1,069 | 1,196 | 6,579 |
서신교환 | - | 39 | 623 | 9 | 8 | - | - | - | - | 679 | |
방남상봉 | 30 | 201 | 100 | - | - | - | - | - | - | 331 | |
방북상봉 | 35 | 202 | 100 | 398 | 598 | 400 | 397 | 594 | 388 | 3,112 | |
화상상봉 | - | - | - | - | - | - | 199 | 80 | 278 | 557 |
출처 : 통일부, 『통일백서 2008』(서울 : 통일부, 2008) p.206쪽에서 인용
2000년 정상 회담이후 시작된 장성급 회담에서 남북한은 상호 비방 중단을 합의하고, 선전 방송과 선전물을 철거하기로 했다. 전쟁이후 비무장지대는 남북
비난전쟁의 또 다른 전선이었다. 남쪽은 1 세트에 8개의 대형스피커로 이루어진 확성기를 2~4 세트로 묶어, 전방초소와 전방지역 마을 등을 대상으로
방송했다. 북한역시 1990년대 전선지역에 104개의 확성기로 하루 13~15시간 동안 방송을 했다. 북한의 대남 확성기 방송은 주로 비방, 선동, 체제 선전에
집중했다.
드디어 2004년 6월 15일부터 방송 중단을 합의한 2차 장성급 회담 합의에 따라, 6월 14일 밤 양측은 고별방송을 내보냈다. 155마일 휴전선 곳곳에 달려
있는 확성기를 통해 남쪽은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 말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면서 그동안 우리 자유의 소리 방송을 들어준 인민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무궁한 행운을 빕니다." 그렇게 대결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북쪽역시 11시가 넘어 "통일의 그날 우리 만납시다."(남성),
"꿈결에도 바라던 통일의 그날, 기쁨과 감격에 울고 웃으며 서로 얼싸 안읍시다"(여성)라면서 고별방송을 했다.
2000년 이전에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신뢰구축, 교류협력, 이산가족 상봉 등이 실제로 실행되지 않았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합의의 시대에서 실천의 시기로 이행했다. 그 이전에는 대결과 경쟁을 추구했다면, 6∙15는 화해와 공존을 추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상회담은 합의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정치적 신뢰의 회복으로 이어져 실질적인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작용했다. 개성공단, 금강산, 철도 도로 연결 사업이 시작되었고, 이산가족 상봉이 정례화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남북대화의 제도화도 중요하다. 장관급 회담과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는 총괄이행 회담과 경제협력에 관한 분야회담으로 정착되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핵문제 해결에서 남북 당사자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것도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