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마산의 유신반대운동
마산의 경남대에서는 1979년 8월 말경부터 3.15의거 이후 최초의 반정부 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학생그룹들이 있었다. 이들은 부산의 시위 소식을 접하고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10월 18일 2시경에 시위를 막으려는 경남대 당국의 휴교령에 반발하면서 자신들의 당초 계획을 앞당겨 시위를 감행했다. 학생들은 오후 5시경부터 3∙15의거탑 앞에 모여 시위를 전개했고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마산의 중심가인 창동, 부림시장, 오동동, 불종거리 등에서 퇴근하는 노동자 등 시민들이 합류했고 곧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시위대는 주택과 상가의 전등불을 끄게 하고 "박정희 물러가라", "언론자유 보장" 등을 외치면서 새벽 3시경까지 공화당사, 박종규의 저택, 마산경찰서, 마산세무서, 7개 파출소 등을 파괴하였다. 19일 오후 5시경 부산에 파견된 공수부대 1개 여단이 마산으로 급파된 가운데 저녁 8시경부터 자연스럽게 모인 민중들의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민중들은 군인과 경찰의 진압에 맞서 20일 새벽 3시경까지 마산MBC, 전신전화국, 파출소, 동사무소 등을 공격하였다. 유신정권은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였다.
3∙15의거는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 엄청난 부정선거를 저지른데 분노하여 마산시민들이 항거하였던 사건이다. 3월 15일에 일어난 1차 의거에 이어 4월 11일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됨으로써 벌어진 제2차 의거는 4월혁명의 폭발을 선도한 도화선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3∙15의거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경남대학생들은 3∙15의거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폭압적인 유신독재에 한번도 저항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있었고 이것이 학생들을 항쟁으로 이끈 요소 중의 하나였다. 경남대학생들은 교내의 시위가 막히자 시내의 3∙15의거탑에 모이기로 했고 거기서 마산의 항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시위에 나서면서 유신체제의 탄압과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거리 주변의 주택, 상가, 승용차 등의 전등불을 끄도록 하여 경찰이 시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하여 신변의 안전을 꾀하고자 하였다. 거리가 어두워지자 시위는 더욱 거세어졌다. 평소 시민들의 원성이 높았던 경찰서, 세무서 등 행정기관과 공화당사 그리고 언론기관이 공격을 받았다.
최창림 마산경찰서장은 1979년 10월 20일 오후 5시 기자회견을 열어 "18일과 19일의 시위는 폭동에 가까운 시위였으며 이번 사태에서 사제 총기와 탄피 2개가 발견되었다"고 밝히면서, "이 총기의 성능은 스프링식으로 탄환 일발씩의 발사가 가능하고 인명살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한손에 쥐고 발사할 수 있으며 사정거리는 50M 정도이고 탄환을 교체할 때는 계속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보아 이번 소요의 배후에는 조직적 불순세력이 개입된 징후가 농후하다"고 했다. 이 총기는 18일 밤 10시 마산시 황금동 골목에서 불순분자가 총기를 발사, 도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전경대원이나 시위대는 총소리를 듣지 못했고 총기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으며 기자회견에서 나온 질문에 대해서도 서장은 답변을 회피했다.
경찰은 사제총을 실물로 제시하지 않았고 근거가 박약한 주장만 내세웠지만 그 후에는 거론하지도 않았다.
이로 미루어 사제총 발표는 부마항쟁을
불순세력의 음모로 몰아가려는 공작을 펴기 위해 경찰이 조작한 거짓말로 보여진다.
3∙15의거 때도 마산 시위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식의 이승만 대통령 담화문이 나왔다. 그 당시와 비교해 자기 생각을 정리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