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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와 제6공화국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해, 군부정권은 합헌적으로 재집권하게 됐으며, 집권과정의 정당성 부재라는 ‘원초적 취약성’을 극복하는 계기가 됐다. 군부정권은 선거라는 규칙을 통해 권력을 재생산했지만 여전히 군부정권으로 평가됐다. 이러한 평가는 권력 담당자의 출신과 충원, 권력의 원천, 정책방향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노태우의 제6공화국은 전두환 정권에 비해 군부와 보안기구의 강압적 역할과 독점적 지위를 어느 정도 약화시키고 민주적 절차를 회복했다. 그렇다고 지배세력의 근본적 속성의 변화가 동반된 것은 아니었다.
노태우 정권의 핵심세력은 군부와 TK세력이 형성하고 있었다. 권력 핵심세력 중 군 출신 인사가 5공보다는 적었지만 6공화국에서도 여전히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TK세력의 분포는 오히려 5공에서보다 6공에서 다소 강화됐다. 이러한 결과는 군 출신으로서 노태우 대통령 자신의 한계와 지역정당 정치구도에서 필연적으로 TK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빚어낸 결과였다.
노태우 정권은 과거 전두환 정권과 단절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권력승계과정에서 전두환-노태우 진영 사이의 미묘한 갈등으로 표출됐으며,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는 ‘5공 단절’의 형태로 나왔다. 전두환 일가 비리를 수사하고, 일부 5공 실세를 물러나게 했다. 특히 1988년 11월부터 국회 내에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특위’ 등이 설치돼 청문회를 열어 광주사태 진상규명, 정경유착 규명, 일해재단 비리규명, 1980년 언론통폐합 등의 진상규명 활동이 전개됐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전두환?이순자 부부는 설악산 백담사로 떠나 현대판 유배생활을 했다. 노태우?민정당은 여소야대 국회를 역전시키기 위해 김영삼?민주당, 김종필?공화당을 끌어들여 1990년 2월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3당 합당으로 민주화와 개혁은 타격을 입었고, 김대중?평민당은 고립됐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공안정국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들어와 남과 북의 정부관계는 급진전했다. 1990년 9월부터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이 열렸고, 남북통일축구대회를 여는 등 체육경기에도 교류가 활발했다. 1991년 9월 17일에는 남과 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그 해 12월 제5차 남북고위급 본회담에서는 정원식 국무총리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가 서명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됐다. 노태우 정부는 1987년 6?29선언에서 약속한 대로 1991년 3월과 6월 지방자치선거를 부분적으로 부활시켰다. 5?16 군부쿠데타로 지방자치가 조종을 고한 지 꼭 30년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