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긴급조치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특히 헌법 제53조를 보면 대통령은 “천재 지변이나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국정 전반에 걸쳐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72년 12월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3월 각급 학교가 개학에 들어가자 대학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거기에 불을 붙인 것은 73년 8월에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납치되었다가 1주일 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면서부터다. 그리고 10월부터는 서울대 문리대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대대적으로 학생들을 연행하여 구속하고 제적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했지만 시위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확산되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구속학생을 전원 석방하고 처벌을 백지화한다고 발표하지만, 12월 24일, 장준하 등이 중심이 되어 개헌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지자 다시 시휘가 확산되었다.
해가 바뀌고 74년 1월 8일, 마침내 박정희 정권은 비상수단을 꺼내든다.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표하여 일체의 개헌논의를 중단시키며, 이를 위반할 경우 영장 없이 체포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날로 거세졌다. 박정희 정권은 또 다시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 74년 4월 3일, 데모를 주동한 사람에게는 최고 사형에 처하고, 시위가 격렬한 학교는 폐교시킬 수 있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고, 민청학련사건이라는 공안사건을 발표하여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사상 최대의 공안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180여 명이 구속되었으며, 인혁당 관련자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2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계속해서 반유신운동은 확산되고 학생, 재야, 야당의 저항이 거세지고, 해외에서도 박정희 정권의 폭정을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다시 비상수단을 취한다. 75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여론을 호도한 뒤 유화조치의 일환으로 긴급조치 1, 4호 위반자를 대부분 석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시위가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4월 초부터 고려대학을 비롯하여 반유신데모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고등학생들까지 여기에 가담하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7호를 발령하여 시위의 진원지인 고려대학에 휴교령을 내리며, 4월 8일에는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해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형을 집행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이 무렵 4월 30일, 베트남이 함락되어 공산화되고 시위는 더욱 가열되었다. 그러자 박정희정권은 5월 13일에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9호를 발령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부정, 반대, 왜곡, 비방이나 개폐 주장, 청원, 선동을 금지하며, 이를 보도하는 행위도 금지시켰다.
유신체제를 영구화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낸 것이며, 이는 79년 10.26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릴 때까지 무시무시한 탄압의 도구로 이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