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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 사망

5기 전대협은 1991년 4월 11-12일 연세대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반민자당 민주연합전선 구축을 중심과제로 채택했다. 이어 학생들의 반민자당 투쟁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4월 26일 시위 도중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명지대생 강경대가 사망했다. 이는 공안정국 이후 무차별적으로 감행된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학교 1학년 학생이던 강경대군은 학내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교내 시위 도중 이를 과잉 진압하던 경찰(백골단)의 쇠파이프에 의해 집단 구타당해 사망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4월 26일 오후 5시10-15분경, 명지대학교 교문 옆 담장에서 쇠파이프로 무장한 경찰 5명에 의해 집단 구타당하여 내출혈로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운명하였다.
1991년 4-6월에는 6월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전개됐다. 공안정국으로 운동권이 어려움을 맞고 있었고, 동유럽 사회주의정권의 붕괴로 이념면에서 혼란을 겪고 있던 시기에 명지대생 강경대가 4월 26일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음 날부터 학원을 중심으로 규탄대회가 열렸다. 27일 전민련, 전노협 등 55개 단체와 야당인 평민당까지 참여한 ‘고 강경대군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다. 경찰의 야만적인 탄압에 항의하는 청년?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대책회의가 주도한 국민대회는 5월 4일 전국 23개 지역에서 16만명, 9일 87개 지역에서 30만명, 14일 15개 지역에서 30만명, 18일 81개 지역에서 40만명이 모이는 등 1987년 6월항쟁 기간을 방불케 했다.
5월 9일 전국에서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1991년 5월 투쟁에는 대규모 시위와 함께 학생과 시민들의 분신자살이 많이 발생했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귀정, 김철수 등 모두 10명이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1991년 5월투쟁은 1990년대 최대의 투쟁이었다. 시인 김지하, 서강대 총장 박홍, 연세대 교수 김동길 등이 분신자살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었고, 5월 8일 전민련 소속 김기설이 분신, 사망하자 당국은 전민련 간부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했다고 주장해 운동권을 매도하고 나섰다.
분신은 끊이지 않고 계속돼 5월 14일 강경대 장례식에 맞춰 전국 15개 도시에서 15만명이 참여한 제2차 국민대회가 열리던 때에도 3명이 분신했다. 5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 제3차 국민대회’가 열린 날에는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최루탄을 피하다 깔려죽었다. 그런가 하면 6월 3일 정원식 총리서리가 한국외대에서 학생들한테 봉변을 당한 사건은 ‘인륜의 파탄’으로 비난받았다. 유권자의 의사가 반영된 선거가 치러지고 어느 정도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한 1991년 5월 투쟁은 사실상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했다. 운동권은 노 정권과 보수언론의 공격으로 도덕성에 상처를 입었다. 이 무렵부터 학생들의 사고나 관심이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