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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민중들의 생활상

박정희 정권의 폭압정치와 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민중들의 생활은 매우 힘들고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파이를 키운 후에 분배를 고려한다는 성장제일주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대기업에게는 온갖 특혜를 제공하면서도 노동자들에게는 가혹했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으로 몸이 망가져가는 상황에서도 사업주의 처분만을 기다리도록 강요했다.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온 사람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하여 지게꾼이나 리어카꾼, 혹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몸을 뉠 자리를 겨우 마련하면 재개발 폭탄이 들이닥쳐 쫓겨나야 했다.
국내보다 높은 임금을 바라보고 서독, 월남, 중동의 건설현장으로 파견되었건만, 1, 2년 후 돌아와 보면 아내는 다른 남자와 만나 새 살림을 차린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중, 고등학교 입시제도가 시행되는 시기여서 초등학생 때부터 ‘일류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밤잠을 설쳐야 했으며, 입학원서 접수 현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교련제도가 도입되어 학생들이 교련복을 입고 각반과 요대를 찬 모습으로 등교하는 모습은 학원의 병영화 시도라며 저항을 받았다. 더구나 71년부터 대학교 교련수업을 강화하는 조치가 내려지자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져 수업에 파행이 빚어졌다.
정부는 허례허식을 줄인다며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하여 공포했다. 이에 따라 관혼상제에까지 정부의 규제가 작용했고, 쌀 부족으로 인해 혼식을 거의 강제적으로 장려하였다. 학생들은 도시락 검사를 받아야 했다.
교통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에 낙도 어린이들은 육지구경을 나오는 게 보통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어린이들이 서울 나들이를 하는 것조차 뉴스거리가 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