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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5.16군사쿠데타와 제3공화국

3공화국 시기 청년 학생운동은 1964년 3월부터 1년 반 정도 전국을 들끓게 한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3선개헌 반대투쟁, 그리고 유신 반대투쟁으로 큰 줄기를 이어간다.
1964년 3월 23일에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외상과 회담 체결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자 이튿날 서울대생 등 수천 명이 김종필의 즉시 귀국을 요구하면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5월 들어 다시 시위는 격화되었고, 5월 말경부터는 학생들이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대학가의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자 급기야 6월 3일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발동하고 휴교령과 함께 군인들을 투입한다. 이 시위는 65년 8월 이 조약이 조인된 이후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런 와중에 국회에서는 1965년 8월 13일에 공화당 단독으로 베트남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고, 다음날은 한일협정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군인들이 학교에 투입되고 위수령이 발동되어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고 21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추방되었다.
이른바 6.3사태가 진정되어갈 무렵 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불리한 선거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온갖 불법과 편법을 동원한다. 대선은 물론, 국회의원선거에서는 3선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하기 위해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개헌 정족수를 달성한다. 그러자 다시 야당과 학생들은 선거 전면무효를 주장하면서 대대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한다.
마침내 박정희 정권은 69년 9월 14일 새벽, 공화당의원들만으로 국회 제3별관에서 날치기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폭거를 자행하자 다시 정국은 들끓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연일 시위를 벌여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를 규탄했다.
그리고 70년대로 넘어오면서 10월유신이라는 철권통치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처럼 청년 학생들의 저항이 심해질 때마다 어김없이 간첩단 사건 등 공안사건을 발표하여 이들에게 전면적인 탄압을 가했다. 65년의 인혁당사건, 민비련사건, 67년의 동백림사건 등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조작사건들이다.